[2012-08-01] [뉴스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33회>: 족보 이야기

족보 이야기

필자는 청주한씨다. 청주 한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성 중 하나라고 한다.

‘한’이 바로 대한민국의 그 한(韓)이니 어쩐지 그럴 법 하다. 청주 한씨는 조선시대 왕비도 6명을 배출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미모 때문인지, 재색을 겸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요즘 잘 나가는 여자 연예인 중에는 한씨가 참 많다. 한예슬, 한가인, 한지혜, 한고은, 한은정, 한채영, 한지민, 한효주, 한혜진. 그런데 이 중 실제 한씨는 몇 명 되지 않고 예명이 많다고 한다.

필자가 처음 한씨 족보의 1권을 펼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씨 족보의 시작이 후조선의 태조문성왕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마한의 무강왕, 원왕에 이어 왕자의 계보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쯤 되면 필자는 왕자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것이 진정한 왕자병일까?

농담이다. 분개하지 말길 바란다. 굳이 신분으로 치자면 왕자는 커녕, 조선시대에 의원이라는 직업은 벼슬아치도 아닌 그저 중인 계급이었으니까...

여하튼 필자가 이번에 쓰려는 족보 이야기는, 청주 한씨 이야기도 아니고, 진짜 어느 집안의 족보이야기도 아니다.

지금의 일상은 돌출입수술, 양악수술을 하면서 지내는 성형외과 전문의이지만, 필자에게도 잠못자고 시험에 쫓기듯 살던 의대생 시절이 있었다. 의대공부를 하면서 수없이 많은 시험을 치렀다. 정말 시험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공부는 유희의 인간인 호모루덴스의 본능에 역행한다.

의대공부는 정말로 뇌세포 안에 암기할 양을 억지로 구겨 넣는 작업과도 같다. 아주 잔인하고 괴로운 일이지만, 나중에 사람의 생명을 다룰 사람이 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은 의사의 머릿속에 들어있어야 할 지식들이기 때문이다.

의대시험은 전날 밤새도록 달달 외운 것들을 시험지에 미친듯이 쏟아내는 작업이다. 그렇게 한 판 쏟아내고 나면, 또 그 다음날 시험 볼 과목을 외우기 시작한다. 머리가 쓸 수록 좋아지는 게 맞다면, 나는 의대 공부를 마치면서 엄청나게 머리가 좋아졌을 것 같다.

그런데 세상에 더없이 미련한 것이, 모두 다 외우겠다고 마음 먹는 것이다. 사전을 A부터 Z까지 다 외우면 영어를 잘하게 되는 것이 아니듯이, 아무리 암기과목이라도 중요도가 있다.

이때 족보라는 것이 등장한다. 어느 집안의 가계 혈통을 가리키는 족보라는 말이, 뭔가 뼈대있고 중요한 것이라는 뜻으로 와전되어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늘 시험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것을 족보라고 부른다. 여러번 나온 기출문제를 가리키기도 하며,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정도(正道)를 지칭하기도 한다. 다른 학교에서는 이것을 족보라고 하지 않고 소스(source)라고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족보에도 급이 있다. 안외우면 큰일 나는 것, 꼭 나오는 것은 대개 큰 별 몇 개와 형광펜으로 표시되며 ‘왕족’이라고 불린다. 왕족보의 준말이다.

수술에도 족보가 있다. 꼭 그렇게 해야하만 하는 정석이라는게 존재하는 것이다. 전공의 시절 수술에 들어가면 같은 수술이라도 집도하는 교수님에 따라 족보가 다르다. 어떤 교수님은 흡인기로 피를 닦아 드려야 하고, 어떤 교수님은 젖은 거즈로 피를 닦아 드려야 한다. 반대로 했다가는 수술장 분위기가 험악해진다.

초심으로 돌아가 돌출입, 양악 수술의 왕족보는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돌출입, 양악 수술을 받는 사람 혹은 하는 사람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첫째 수술경험, 둘째 안전, 셋째 수술솜씨, 넷째 미적감각과 수술결과, 다섯째 마음이라고 하고싶다.

돌출입수술, 양악수술이나 안면윤곽수술을 할 때, 의사의 마음은 다른 것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다. 진심이 있어야 감동적인 결말도 있다. 의사가 수술을 보람있어 해야 마음도 따뜻해지고,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정직해진다.

필자는 이 왕족보에 얼마나 근접한 의사일까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명지대 김정운 교수는 감동하라, 감탄하라고 역설한다. 부모의 감탄이 아기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듯, 감탄은 우리 삶의 동력이 된다고 한다.

필자가 의사로서 앞으로 만나게 될 돌출입, 양악, 그리고 윤곽수술 환자들과 늘 아름다운 만남, 서로에게 감탄하는 만남이길 바란다.

 

칼럼니스트 한상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성형외과 전문의, 의학박사

서울대학교 병원 성형외과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수료

서울대학교 병원 우수전공의 표창

전 서울대 의과대학 초빙교수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연제발표 다수

돌출입 관련 강연, 주제논문 채택, 발표, 방송출연 다수

저서 '돌출입 수술 교정 바로알기'(2006. 명문출판사)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