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3] [뉴스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30회>: 가을비 내리는 연못, 자하연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 <30>


가을비 내리는 연못, 자하연

2011-11-18 오후 4:19:30

병원 밖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병원 안에는 양악수술 준비가 시작되고 있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속설이 있다. 필자도 가을 꽤나 타는 남자였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좀 무던해졌다. 이렇게 무뎌진 게 서글프기도 하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그래도 가을이 되면 한번쯤, 필자는 갓 스무살을 넘긴 대학캠퍼스를 떠올린다.필자가 다녔던 관악캠퍼스의 가을단풍은 장관이었다. 아니, 장관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가슴 뭉클하도록 그립지만, 사실 그 땐 너무 새파랗게 젊어서 붉게 물든 아름다움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마음 속 신비의 공간처럼 각인되어 있는 곳은 자하연이라는 연못이다.

'샤' 마크로 불리는 거대한 학교상징이 고압적으로 서있는 정문, 천재와 영재와 수재와 공부벌레들이 드글드글한 찬바람나는 강의실과 도서관이 나를 압도했다면, 자하연은 시공간의 차원이 완전히 다른 블랙홀같이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그런 곳이었다.

가을비 내리는 어느날, 그 신비로운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기억한다. 난 혼자 그 다리를 건너본 적이 있다. 연인이 함께 그 다리를 건너면 헤어지게 된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여자친구가 생기면 절대 같이 건너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몇 해 전 어느 가을, 전신마취를 하는 안면윤곽, 돌출입 수술이나 양악수술을 여간해서는 잘 하지 않는 토요일 오후에 돌출입수술을 하나 마치고 홀로 모교 캠퍼스를 찾았다. 필자가 아직 가을을 탈 때였다. 더듬거리는 기억으로 찾아간 자하연은 변해있었다. 자하연은 전에 없던 깔끔한 벤치와 발코니, 수중분수를 갖춘 잘 정비된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해있었다. 그리고 돌다리는 없었다.

아아, 자하연에 다리가 없다. 이제 자하연의 다리는 건널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전설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자하연을 같이 건넜던 연인들은 정말 헤어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헤어졌을 것이다. 필자를 포함해서 누구나 대학에 가면 다 컸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스무살 갓 넘긴 애송이 커플들이 십 년 쯤 연애를 계속해 결혼에 골인할 확률은 희박하다. 물론 다리를 안 건넜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컨대 당시 대학 1, 2학년인 제 연인의 손을 잡고 객기로 다리를 건넜던 커플들은 거의 다 지금쯤 다른 남자의 아내,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하연 돌다리의 저주가 현실이 된 셈이다. 아이러니컬하지만 그 저주 덕택에 지금 더 행복해졌을 수도 있다.

사랑이든 뭐든 처음이란 다 떨리고 불안하고 위험하다. 첫수술은 어떨까?

불편한 진실이지만, 어떤 의사든지 첫 수술이 있다. 당신이 그 첫 수술의 대상이 되기는 정말 싫겠지만, 여하튼 처음이 없으면 숙련된 의사도 없다. 물론 제멋대로 첫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급자가 손잡아 가르쳐주면서 배워나가는 것이다.

필자에게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초집도 기념패’가 있다. 의사로서 처음 사람의 몸, 환자의 몸에 칼을 댄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 날 외과의사로서의 운명이 결정된다. 아니, 결정되어 있던 운명이 드러난다.

필자가 이제는 일상처럼 여기는 돌출입, 양악 수술 역시 마찬가지다. 필자에게도 첫 돌출입수술, 첫 양악수술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십여년 전의 일이다. 그 때 내 손을 잡아 가르쳐준 은사님, 선배님에게 감사한다. 다행히 당시 돌출입, 양악 수술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분명히 그 땐 지금보다 더 수술을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권위자로 알려진 어떤 교수나 의사라도 처음에는 서툴기 마련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환자가 명의를 만들어준 셈이다. 즉, 집중적인 수술경험이 훌륭한 의사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물론 똑같은 수술이 반복되어도 실력차이는 존재한다. 달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알 수 있다. 똑같은 일을 10년 해도 달인의 속도와 정확성은 남다르다.

돌출입 수술을 하러 온 환자가 ‘5년 전부터 원장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이제 찾아왔어요‘라고 하길래 필자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잘하셨습니다. 5년 전보다 지금이 아무래도 더 낫겠지요.’

흔한 이야기지만 역시 사랑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열정의 스무살, 그 때의 서툰 사랑은 풋풋하고 아름답지만 참 깨지기 쉽고 영원하기 어렵다. 어찌보면 수술도 의사와 환자의 타이밍이 중요하다. 처음 해보거나 몇 번 안해본 수술은 의사에게는 짜릿한 경험이지만 환자에게는 우울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한편, 경험이 많은 사랑의 방식은 뭔가 순수함을 잃고 능글거리고 지나치게 세속적이 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경험이 많은 의사는 타성에 젖는 매너리즘과 만용 그리고 과욕을 경계해야 한다. 순수함과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을 언제쯤 만나게 될까?어느 소설 속 여주인공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이렇게 속삭인다.‘우리가 늦게 만난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예요.’

자하연에 가보고 싶다. 연못에 떨어진 단풍잎이 온 몸으로 가을비를 받아내고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한상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성형외과 전문의, 의학박사

서울대학교 병원 성형외과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수료

서울대학교 병원 우수전공의 표창

전 서울대 의과대학 초빙교수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연제발표 다수

돌출입 관련 강연, 주제논문 채택, 발표, 방송출연 다수

저서 '돌출입 수술 교정 바로알기'(2006. 명문출판사)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