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3] [뉴스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25회>:내가 의사가 안 되었다면

[노컷헬스컬럼]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 <25>

내가 의사가 안 되었다면

2011-11-01 오후 5:12:44

필자에게는 말 못할 병이 있었다.

혈관미주신경성 반응이라는 것인데, 심하면 실신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돌출입, 양악 수술을 하다가 실신할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중학교 2학년때 나는 1년 내내 거의 전교 2등만 했다. 그런데 반에서도 2등이었다.

10개 학급이 있었으니 전교 10등안에만 들면 반에서는 당연히 1등이어야 맞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우리반 1등하는 녀석이 전교 1등이었고 우리반 2등인 내가 전교 2등을 도맡아했다.

한번은 국어, 영어, 수학 세과목만 본 시험에서 그 친구와 나는 둘다 딱 1개씩만 틀린 적이 있다. 이번에는 공동 1등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25문제라서 한 개에 4점인 수학 한 문제를 틀린 나는 총점 296점이었고 33문제라서 한 문제에 3점인 국어 하나를 틀린 그 친구는 총점 297점이었다. 또 다시 그 녀석이 전교 1등이었고 내가 전교 2등이었다. 그 친구는 정말 날 미치게 만드는 경쟁자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친구가 없었다면 난 그렇게 빠득빠득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몸살이 났다. 병원에 가서 링거액을 맞았다. 혈관주사 바늘이 내 혈관을 찌르는 순간, 나는 얼굴이 노래지면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혈관미주신경성 실신이 온 것이다.

정맥주사 혈관 근처에는 부교감신경의 일종인 미주신경 다발이 지나가고 있는데 주사바늘의 자극에 의해 이 신경이 활성화되어 실신이나 쇼크와 유사한 증상이 발현되는 것이다. 다행히 미주신경성 실신은 대부분 인체에 무해하며 특별한 치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의대에 못갈뻔한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 미주신경성 실신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의사가 되길 원하셨다. 의사가 되시려던 선친이 피보는 것이 싫어 약사가 되신 아쉬움도 있으셨고 집안 사촌 이내에 의사가 열명도 넘는 집안 분위기도 한 몫했다.

그러나 이 미주신경성 반응이 나타난 후 나는 의대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내 스스로가 주사하나 제대로 못맞는데 남의 혈관을 찌르고 피를 보는 것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의대를 못갈뻔한 두 번째 이유는 선생님들의 충고였다. 중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은 미대에 가라고 권했고, 생물선생님은 생물학과에 가라고 하셨다. 공업 선생님은 공대에 가라고 하셨다. 머리 좋은 학생이 전부 의대만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들 하셨다.

의대에 못갈뻔한 세 번째 이유는 낙방의 고배였다. 대학입시 첫해에 의대에 낙방하면서 S대 치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재수를 해서 S대 의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도 당시의 치대학생증, 의대학생증을 나란히 보관하고 있다. 지금 내가 돌출입 수술, 양악 수술과 같은 악안면수술, 즉 치아와 관계있는 잇몸뼈에 대한 수술을 하게 된 것은 참 아이러니컬하다.

그런데 주사 맞다가 쓰러지던 필자가 의대에서 실습을 하고 남에게 주사를 놓고 피를 보고 수술을 하는데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우습게도 전혀 없었다. 고통은 커녕 남에게 주사를 찌르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게다가 주사, 피, 수술 등에 익숙해진 덕택인지 이제는 필자도 주사를 잘 맞는다. 말못할 병이 나아버린 것이다. 그러니 행여나 필자에게 돌출입, 양악 수술을 받는 중에 필자가 실신을 할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돌출입, 양악 수술을 받는 환자는 미리 병실에서 링거액을 맞게 된다. 요즘에도 필자는 가끔 혈관이 잘 보이지 않아 주사놓기 힘든 환자에게는 간호사 대신 직접 정맥주사를 놔준다. 딱 한 번만에 성공하곤 우스갯소리로 ‘특진 주사’라며 생색을 내기도 한다.

주사를 맞다가 실신한 일, 미대나 공대에 가라는 선생님들의 충고, 의대낙방과 치대입학이 어찌보면 결국 지금 성형외과 전문의로서의 삶 속에서도 한데 어우러져 나와 뗄 수 없는 인연들이 되어 버렸다.

돌출입, 양악 수술을 할 때 ‘치과’와 팀진료를 하고 있고, 돌출입, 양악, 얼굴뼈 수술을 할 때 절골선을 ‘디자인’하고 절골용 톱으로 환자의 얼굴뼈를 절골하면서 필자는 ‘미술’도 하는 셈이고 ‘기계’도 다루는 셈이다.

김난도 교수는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우리의 삶은 일과 여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여가는 절반에 지나지 않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업으로 나머지 절반을 채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돌출입, 양악, 얼굴뼈 수술을 통해, 의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디자인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공구도 만지면서 일할 수 있는 나는 참 행복하다.

만약 필자가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 내재된 창조의 욕구 때문에 뭔가를 그리고 만지고, 다듬고, 만들어내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옷이었을지, 조각품이었을지, 자동차였을지, 줄기세포를 이용한 생체재료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칼럼니스트 한상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성형외과 전문의, 의학박사

서울대학교 병원 성형외과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수료

서울대학교 병원 우수전공의 표창

전 서울대 의과대학 초빙교수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연제발표 다수

돌출입 관련 강연, 주제논문 채택, 발표, 방송출연 다수

저서 '돌출입 수술 교정 바로알기'(2006. 명문출판사)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