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2]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109회> : 운동회

(필자 주 : 2020년 말에 작성된 칼럼입니다. 누락되어 2021년 2월에 추가하였습니다)



운동회



누구나 힘들었겠지만, 2020년 한 해는 운동선수에게도 고난의 해였을 것이다. 도쿄 올림픽도, 전국체전도 모두 취소되었다. 대회날짜에 맞추어 체력과 기술을 연마해왔던 선수들은 물론이고, 사회체육을 하는 동호인들, 심지어 동네 ‘헬스장’ 다니던 사람들에게도 괴로운 한 해였다.

올해는 초등학교에 운동회 같은 행사도 모두 취소되었지만, 몇 해 전 아이의 운동회에 설레는 맘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운동회 날짜가 공지되었을 때부터 필자의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삼사십 대일 것이 분명한 학부형들과 계주나 단거리 달리기를 할 생각에서다. 초등학생의 학부모로서는 최연장자에 가까운 오십대의 노구를 이끌고 그들과 겨룰 생각에 설레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철이 없는 셈인데, 누군가 ‘남자는 철들면 죽는 거다’라고 했던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필자는 키가 반에서 다섯 손가락 이내로 꽤 작았다. 뛰거나 걸을 때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의 거리, 즉 컴퍼스(compass)가 친구들보다 짧았을 테지만 그래도 운동회 때 6명씩 출발하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면 1등을 놓친 적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 키가 쑥 큰 필자는 S대 의대를 다닐 때는 키가 동기들 평균보다 컸다. 의대 축구반 6년 동안 공 잘 차는 것보다 빠른 걸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 빠르다고 자부했던 몸은 S대 병원 인턴생활 단 몇 개월 만에 망가졌다. 졸업생, 학부생 친선 축구대회 때, 인턴인 필자가 본과생 몇몇과 재미삼아 단거리 달리기를 했는데 몸이 내 몸 같지가 않았다. 선후배들은 인턴(이라는 과정)이 사람을 이렇게 (폐인으로) 만든다면서 깔깔댔다.


하물며 50살이 넘은 필자가 달리기 시합에 대비하려면 하루에 10분, 20분, 30분씩 런닝머신에서 강도를 높여가며 몸을 만들어야 할 판인데, 전혀 그런 계획은 없었다. 대신 운동회 날짜 2주전쯤 마침 일본 여행 중에 N사 매장에서 최신상 런닝화 하나를 장만했다. 단거리인지 장거리인지, 바닥이 흙인지 트랙인지를 물어보며 2등병처럼 절도 있게 ‘하이, 하이’를 연발하는 점원이 필자 못지않게 심사숙고해서 골라준 것이었다.

드디어 운동회 날이 왔다. 너무 달리기에 올인하는 트레이닝복 같은 걸 입으면 1등을 해도 반전이 덜할 것 같아서, 평상복 같지만 운동복인 스판 골프바지를 챙겨 입었다. 아이의 꼭두각시 공연 같은 걸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내 심장은 잠시 후 벌어질 학부모 달리기를 생각하며 두근거렸다.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각 반 아버지, 어머니들의 반 대항 경기가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운동화 끈을 조였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다리 근육을 풀었다. 경기가 열리는 출발선으로 갔다.


그곳에는 출발을 알리는 긴장감 백배의 총소리도, 결승선을 가로지른 흰 테이프도 없었다.

대신, 포대자루에 들어가 깡충깡충 뛰어 반환점을 돌아오는 캥거루 달리기가 열리고 있었다. 아...바람처럼 트랙을 달리겠노라고 야심차게 준비한 런닝화는 이런 희비극같은 결말을 끝으로 신발장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몇 년 쯤 지나야 운동회가 열릴까? 그 때가 되면 내가 제대로 뛸 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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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필자를 찾는 환자에게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아직도 수술 안하셨어요?” 수술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몇 개월이 지나가기 십상이고, 십 수 년이 지나가기도 한다. 영어 원문을 오역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특히 국내에) 잘 알려져 있다.


얼마 전 필자를 찾아온 38세의 여자환자 A.

고등학생 때부터 20년 동안 필자의 병원 홈페이지에 드나들며, 내가 쓴 글과 수술 정보들을 탐독해왔다고 한다. 참 오래도 지켜보셨다. 필자의 돌출입수술은 한 시간도 안 걸리는데, 그걸 하려고 20년을 기다린 셈이다. 수술이라는 게 무섭기도 했겠지만, 학생 때는 부모가 반대했을 수도 있고 선뜻 수술을 시켜주지 못할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직장 다니다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기 낳고 살다보니 한 10년이 또 훅 지나갔을 것이다. 문득 거울을 보다가 이번에는 정말 돌출입을 어떻게든 수술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번에는 남편이 새로 시집갈 것도 아닌데 무슨 얼굴뼈를 건드리냐면서 뜯어 말리고 있을 수도 있다.

사실, 자기 얼굴뼈에 ‘톱질’을 하도록 하는 것은, 여러모로 쉬운 결정이 아니다. 수술이란 누구나 피하고 싶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환자의 입장은, 필자에게 있어서 돌출입수술이 비교적 간단한 수술인 것과는 간극이 있을 것이다.

여하튼 우물쭈물하다가, A가 아름다운 입매로 살 수 있었던 이삼십 대의 청춘은 이미 지나갔다. 돌출입수술의 효과가 ‘귀하의 평생’ 아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름답고 콤플렉스 없는 모습으로 사는 기간을 늘리는 방법은 명백하다. 다만, 잘못된 수술로 합병증이나 불만족의 가능성도 있으므로 수술 결정에 신중해야 함은 물론이다.



반면에 15분만에 수술을 결정했던 B도 있다.

이를테면 필자가, 지나가는 사람이나 커피샵 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돌출입이고, 내가 예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비 오는 날, 자주 가던 단골 와인샵의 와인 어드바이서였던 B가 그 날 따라 지치고 힘들어 보였고, 필자는 그녀가 아주 심한 돌출입이라는 걸 문득 깨닫게 된다. 조심스럽게 돌출입수술이라는 게 있다고 이야기를 건네고 나서 괜히 좀 미안한 마음에 와인을 몇 병 더 골라 계산을 하고 자리를 떴는데, 한 15분 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필자 전화번호가 단골 고객으로 등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가능한 한 빨리 돌출입수술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필자가 더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돌출입수술을 할 당시, B는 결혼으로 얻은 상처를 안고 어린 아이와 함께 친정에 들어가 있었을 때였다고 한다. 돌출입수술을 받고 나서, 친정엄마가 아침마다 우리 딸 참 예쁘다고 쓰다듬어 주신다는 이야기에 필자도 가슴이 먹먹했다. 그녀는 지금 와인샵의 대표가 되었고, 물론 필자는 그 와인샵의 단골이다. 그녀는 인생의 2막 1장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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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 환자의 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돌출입수술을 받고 나니 세상이 저에게 친절해졌어요!” 라는 말은 단연 감동이었다. 이 짧은 단문은, 돌출입으로 살아온 동안 퉁명스럽고 불만 있어 보였던 오해, 그로 인한 위축감,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들, 모욕적인 별명이나 마음 속의 컴플렉스들과 동시에, 돌출입이 사라진 후의 자신감, 자존감, 주위 사람들의 호의와 달라진 태도, 배려 받는 느낌, 활기와 기쁨 같은 것들을 모두 다 함축하고 있다.


돌출입수술과 동시에 눈밑 지방 재배치수술이나 안검성형수술을 하는 환자들이 자주 묻는 것 중에, 눈을 젋게 만드는 이런 수술은 다시 재발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다. 나중에 더 나이들어서 수술할수록 더 유리하지 않냐는 것이다.

그렇다. 수술로 눈을 더 젊게 만들어놓아도, 그 시점부터 다시 시간은 흐르고 중력은 피부를 늘어뜨린다. 약 1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다시 노화가 되고 다소간 재발을 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최대한 수술 횟수를 줄이고 단 한번만 수술하는 방법은 바로, 사망 직전에 딱 한 번 눈 수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아름다운 눈으로 지내는 기간은 인생에 몇 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삶이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돌출입수술은 재발하지 않는다. 돌출입수술을 한 이후로 다시 조금씩 입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돌출입수술로 아름다워진 입매를 가지고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에게는 이득일 것이다. 20년 고민하다가 수술하기도 하고, 15분 고민하다가 수술하기도 한다. 평생을 고민하다가 예순이 넘어 한풀이 하듯 수술하기도 한다. 모두, 환자의 선택이다.


런닝화를 사도 달리기 경주가 열리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돌출입수술을 하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다 해도, 결국 수술대에 눕지 않은 환자의 입은 들어가지 않는다. 믿을만한 집도의와 안전한 수술장이 없어도 역시 제대로 된 수술은 이루어질 수 없다. 피검사까지 다 마쳐놓고 결국 수술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사람도 있고, 오늘 와서 내일 수술해달라고 조르는 환자도 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요즘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학부모 계주나 달리기를 안 하는 추세라고 한다. 마음만 청춘이고 몸 상태는 엉망인 애 아빠들이, 마음은 결승점에 가 있지만 몸은 바닥에 널브러져 크게 다치는 사고가 빈번하다는 게 그 이유다. 안쓰러워서 차마 구경하기도 어렵고, 다친 학부모의 보상 문제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혹시 그 운동회 날 학부모 달리기가 있었다면, 마음만 앞선 필자 역시 크게 넘어져 어디가 부러졌을 지도 모른다. 만약 필자가 다쳐 깁스라도 한다면, 돌출입수술을 준비해 온 환자들은, 런닝화는 샀지만 달리기 시합은 없어진 것처럼 허탈할 것이다.


가끔, 신발장을 열 때마다 한 번도 전속력으로 달려보지 못한 런닝화를 보면 피가 또 끓는다. 그런데, 운동회가 열리기는 할 것인가...

혹시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돌출입, 광대뼈, 사각턱을 보며 피가 잠시 끓다가 또 잊고 우물쭈물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준비한 올림픽도, 송년회도, 크리스마스 파티도 전격 취소되는 요즈음, 선택의 기회를 강제취소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코로나 시대에 누리는 행복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아름다움을 조각해내는 필자의 수술장(operation room)은 오늘도 가동 중(in operation)이기 때문이다.



오늘 돌출입수술을 하는데 마이클 부블레의 이 수술장에 흘러나왔다. <울면 안돼>로 번안(飜案)된 캐롤이다. 모두가 힘든 시기이지만 울지 말고 이겨내 보자.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로 휑하고 쓸쓸한 12월이다. 마스크 쓴 산타가 2주 격리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나타나 줄지 지켜볼 일이다.





한 상 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준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발표, 강연

2018,2019 한국 및 타이완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초청강연

20년간 돌출입수술과 얼굴뼈 수술 경력


출처 : 이코노믹리뷰(https://www.econovill.com)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