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 <72회> : 잔인한 4월, 라일락 꽃향기


잔인한 4월, 라일락 꽃향기



요절한 작곡가 고 이영훈님은 지금 들어도 세련된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가수 이문세의 명곡 <가로수 그늘아래 서면> 이라는 노래는 라일락 꽃향기 맡으며...로 시작한다.

필자에게 라일락 꽃향기는 잔인한 4월과 연관되어 있다.

예과 2년, 본과 4년의 의대 생활에서, 본과 1학년의 봄은 가장 잔인하다. 예과 2년간 겪어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강의, 두꺼운 영어 원서, 물리적인 절대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는 아무리 머리가 좋은 천재라도 머리 속에 집어 넣을수가 없는 해부학용어, 의학용어의 암기 또 암기. 반복된 시험, 밥먹는 시간 빼고는 아침부터 밤까지의 도서관에서의 하루.

때 마침 시체해부가 시작된다.

라일락 향기가 교정을 휘감는 4월이다.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모든 조직에 침투시켜놓은 포르말린 냄새를 뒤로 하고 해부학교실 건물을 내려와 도서관으로 향하면, 목덜미를 스쳐지나가는 라일락 향기.

그 라일락향기에게 지면 휴학이고, 이기면 견뎌내는 것이 본과 1학년의 숙명이었다. 잔인한 4월에는 삶같지 않은 삶에 회의를 느끼는 동급생들의 휴학이 줄을 이었다. 매년 그랬다고 한다. 어찌보면 나약했던 그들이 더 인간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본과 1학년이면 스물 두살.

정말 연애하기 좋은 청춘의 시간은 음습한 도서관에서 썩어들어갔다. 가슴은 메마르고 머리는 비대해졌다. 머리를 툭 치면 해부학용어가 줄줄 새어나올 기세였다.

이제 세월이 흘러, 고통스럽던 시간은 정지화면으로 만든 액자처럼 추억이 되었다. 필자의 뇌에 본능처럼 각인된 해부학지식의 덕을 보며, 그 때 주저앉지 않고 해부학 A학점을 받아낸 나 스스로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돌출입수술, 광대뼈수술, 사각턱수술, 양악수술을 할 때, 턱끝신경(mental nerve), 하치조신경(inferior alveolar nerve), 하안와신경(infraorbital nerve), 안면신경의 측두가지, 하악가지(temporal, mandibular branch of facial nerve) 등의 신경이나, 안면동맥(facial artery), 대구개동맥(greater palatine artery), 키셀바흐 혈관총(Kisselbach plexus) 등의 혈관들의 위치를 투시라도 하듯 머릿속에 그리고 수술하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며칠 전 필자를 찾아온 20세의 남자환자는, 자신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정말 대책없이 아무렇게나 막 살았고 공부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다가 꿈이 생겨서 행복하고,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꿈 두가지는, 꼭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필자에게 돌출입수술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원하는 대학을 물었다. 서울대 의대였다. 성공하면, 필자의 후배가 되는 셈이어서 괜히 반가웠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올해 지방대 의대에 합격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고 1 때부터 초등학교 수학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로 시작이 늦었는데, 결국 수능을 정말 잘 봤다고 한다.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지방대 의대에 입학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꿈이 서울의대이기 때문이란다. 아아..무모한 걸까? 단순한 걸까? 아니, 순수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너무 순수해서 내 맘이 스산했다.

그리고 집에서 (다니지 않게 될수도 있는) 대학을 등록해줄 여력 또한 없었다고 했다. 환자는 수능 만점을 받는 것이 구체적인 목표라고 한다. 필자는 진심어린 마음으로, 공부하는데 도와줄 수 있는게 없겠냐고 물었다. 후일 서울의대에 합격한다면, 개인적으로 장학금이라도 마련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모든 꿈이 뜻대로 이루어져, 언젠가 그 친구가 ‘(입매가 특히) 잘생긴 서울의대 본과 1학년 학생’이 되어 있다면, 필자가 공부했던 그 도서관 앞을 지나며 라일락 향기의 유혹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견뎌내길 빈다.


오늘은 돌출입수술과 동시 광대뼈수술이 있는 날이다.

수술하면서 제일 먼저 어떤 음악을 들을지는 독자분들의 예상대로다.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수 없는 기억에 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안고 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이문세 :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1988年) : 작사/작곡 : 이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