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13]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 <66회>: 전파사와 돌출입수술

<전파사와 돌출입수술>


전파사라는 말이 생소한 사람도 꽤 있을 것 같다

네이버 어학사전에 따르면,

전파사(電波社)는 ‘라디오, 텔레비전 따위의 전자기파를 이용한 전기 기기를 주로 취급하는 가게’ 이다.

전파를 만들어 파는 가게도 아닌데 이름이 참 거창하지만, 한마디로, 전파사는 각종 전자제품을 고쳐주는 가게였다. 옛 시트콤 한지붕 세가족에 나오는 순돌이 아빠의 직업이 만물수리점 사장님이었던가? 맥가이버가 와서 배우고 갔다는?

사실, 그 당시에는 전자제품이라봤자, 기껏 선풍기, 브라운관이 있는 뚱뚱한 TV, 다리미 그 정도였을 것이다.지금은 거의 누구나 핸드폰이 있고 핸드폰으로 TV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필자가 어렸을때는 두 집 건너 한집만 TV 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홍수환이나 유제두 같은 권투 세계챔피온이 타이틀 방어전을 하면, 집에 TV가 없는 아저씨들이 하나 둘씩 ‘전파사’에 모여서 경기를 보던 기억이 난다.

왕년 군대 이야기 오래하면 지겨워하듯이, 그땐 그랬었지 하는 얘기도 여기서 stop! (해야 덜 아재 같겠지요?)

* * *

어느날 돌출입수술을 하는데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램프가 깜빡거리다가 불이 꺼졌다.

물론, 또 한 개의 헤드램프가 있어서 헤드램프를 바꿔쓰고 수술을 잘 마쳤다.

(헤드램프 두 개가 모두 일시에 고장이 난다고 해도, 수술실에 원래 달려있는 무영등이 있으니, 독자들은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

수술이 끝나고 문제의 헤드램프를 살펴보니, 배터리에서 램프까지 연결된 전선의 접촉 문제였다. 한쪽으로 꺾으면 불이 켜지고, 반대쪽으로 꺾으면 불이 꺼졌다.

그 헤드램프를 구입한 의료기기상에게 연락을 했다. 담장자가 나의 헤드램프를 살펴보더니 하는 말은 ‘가망이 없습니다’와도 같은 일종의 사망진단이었다.

같은 제품을 더 이상 출시하지 않고 있어서, A/S가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새로운 헤드램프를 하나 장만하시라는 것이었다.

브라*미싱 이라는 재봉틀 회사가 망한 이유는, 제품이 너무 튼튼하고 고장이 나질 않아서 한번 사면 영원히 다시는 새 제품을 구매하지 않아서였다는 설이 있다.

이 논리에 의하면, 헤드램프를 만드는 회사에서는 헤드램프가 일정기간이 지나면 (소모품답게) 고장이 나고, A/S가 되지 않아야 새로운 헤드램프를 팔 수 있을 것이다.

업자가 새로운 헤드램프를 몇 개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독자 여러분은, 불 비춰주는 램프하나가 얼마나 비쌀까 생각하겠지만 이백만원이 넘어간다. 실제로 필자의 머리에 써보기도 했는데, 뭔가 신형이라고 만들긴 했는데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다. 원래 내 것, 옛 것이 좋았다.

필자는 원래 내 물건들, 정든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한다. 입지 않는 옷도 버리질 못한다. 2년인가 안입으면 더 이상 안입는 옷이라는 얘기가 맞는 것도 같다. 실제로 안입는다. 그래도 버리질 못해 옷장을 꽉꽉 채우고 있다.

* *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반신반의하며 검색창에 ‘전파사’를 쳤다.

놀랍게도 병원 근처에 추억의 전.파.사. 가 존재하고 있었다.

사망선고를 받은 불쌍한 헤드램프를 들고 전파사를 찾아갔다.

걸어가는 길은 시간여행 같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고칠 것을 이미 다 고치고 할 일 없어보이는 가게 주인이 인조가죽이 한겹 벗겨지고 헤진 리클라이너에 비스듬히 누워 CSI 마이애미를 열심히 보고 있다가, 불쑥 들어간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헤드램프를 내밀었다. 아픈 아이를 데려간 부모마음이었다.

헤드램프의 생명을 좌우하는 절대자인 전파사 주인은 증상을 듣고 찬찬히 살피더니, 문제가 되는 전선을 예고도 없이 ‘니빠’(니퍼; nipper)로 뚝 잘랐다.

-헛. 잘라도 되나요?

-잘라봐야 알지요.

초조한 10분 뒤, 몇 번 납땜질을 하는가 싶더니 사망한 헤드램프가 부활했다. 세상에~!!!

-다 됐습니다.

-오오...대단하시네요. 이런 분이 있으셔서 다행입니다. 전파사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얼마인가요?

-흠...오천원입니다.

내겐 아주 중요한 물건인데 너무 싸서 또 한번 놀랐다.

더 드리고 싶었지만 오히려 기분 나빠하실까봐 주시는대로 거스름돈을 받아서 꾸벅 인사하고 나왔다.

이렇게 해서 현재에도 필자가 돌출입수술을 할 때, 6년 넘게 내 머리 위에서 제 할 일을 묵묵히 다 해준 헤드램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멀쩡히 살아있다.

이 글을 읽고 ‘에이 원장님, 새거 하나 사시죠’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수험생에게는 몇 년을 같이해온 펜이 중요할 수 있고, 야구선수들에게도 제 손과 한몸같은 글러브가 있을 것이다. 안경이 몇 개가 있는 사람도 그 중에 가장 편안한 안경이 있을 것이고, 펜싱선수에게는 시합 때만 쓰는 행운의 칼이 있을 것이다.

또한 새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온고지신이라는 한자성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필자가 십수년을 정제시켜온 돌출입수술은 옛 것을 축적하고 새것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도입한 것이 아니다. 명작을 만드는 화가에게 새 이젤, 새 팔레트, 새 붓을 준다고 더 훌륭한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옛 헤드램프를 고쳐준 ‘전파사’ 자체가 옛 것이다.

필자의 헤드램프가 새 생명을 얻어 수술부위를 환하게 밝혀주듯이, 필자의 돌출입수술이 돌출입 때문에 위축되었던 많은 분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밝혀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충직한 헤드램프 두 개가 수술장 한 구석에서 늘 ‘출동준비완료‘하고 있다.

볼 때마다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