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0]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 양악 이야기 <64회>: 수줍게 내민 통장 이야기

수줍게 내민 통장 이야기



얼마전 원고독촉을 받았다.

신문사, 잡지사, 출판사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환자로부터...

오랜기간 우리 서울제일성형외과 홈페이지를 ‘탐독’ 해오신 열독자 한분이 얼마전에 병원을 방문하셔서 숙원사업이던 돌출입수술 날짜를 잡고, 검사를 마치시고 가셨다. 그 분은 뜻밖의 말을 건네셨다

-제가 원장님 쓰신 칼럼을 한 개도 안빼놓고 다 읽었어요.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요즘은 한달에 한 개도 안쓰시더라구요. 기다리고 있어요.

이런...내가 게을렀다.

내가 쓴 졸필의 글을 열독해주신다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한편 일종의 원고독촉을 받고보니, 칼럼을 열심히 써야지 하는 의욕도 생겼다. 요즘 통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글’이라고 칭하기에도 한없이 모자란 일상 얘기들을 쓰는 것도 이러할진대, 글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작가들의 창작의 고통은 어떠할까? 모르긴 몰라도 작가들도 늘상 원고독촉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촉이 좀 있어야 글을 쓸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오늘 아침 샤워를 하다가 문득 한명의 환자가 스쳐지나갔다.

몇 년 전,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생산공장에서 생산직 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친구도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 병원 홈페이지를 통해 빠짐없이 내 글을 읽었다고 했다. 필자는 이 환자와 상담을 총 세 번 했다.

처음부터 수술을 꼭 하고 싶다고 했던 환자는 왠지 수술 결정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음에 또 왔을때는 별로 더 궁금한 것도 없어 보였다.

이렇게 계절이 두 세 번 바뀌었다.

세 번째 날 찾아 왔을때는 겨울이었다. 오늘처럼 하얀 눈이 내렸다.

사실 의사 입장에서 서 너 번씩 ‘상담만’ 하러 오는 환자는 조금 조심(?)하게 된다. 환자입장에서 일생의 한번인 수술이니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게 안전하고 확실한 것은 맞지만, 대부분 서 너 번 넘게 병원을 와서 같은 질문을 또 하는 환자들은 의심이 많거나,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닥터 쇼핑을 하는 중이거나, 이런 저런 다른 소견들을 듣고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인 경우가 많다. 이런 환자들은 경험상 수술이 아주 잘 되어도, 역시나, 이번에는 과연 수술이 잘 된 게 맞는지 의심하기 쉽다.

세 번째 날 찾아온 그 젋은 남자는 내 앞에 앉아, 목도리를 풀고, 외투의 지퍼를 반 쯤 내렸다. 그리고 말했다.

-원장님, 저 꼭 수술하고 싶습니다.

-네 수술하시면 될텐데요.

약간 조심스러워진 난 당연한 듯 말했다.

남자는 외투 속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통장이었다.

남자는 통장내역의 마지막 페이지를 펴서 내게 내밀었다.

-원장님, 이런 말씀드리기 너무 죄송하지만, 제가 그동안 돈을 최대한 아껴서 모았는데 지금 이정도입니다. 꼭...수술하고 싶습니다.

난 통장을 집어들긴 했지만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글자가 흐릿해졌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내가 약자를 괴롭히는 구두쇠 스크루지가 된 것 같은 근거없는 자책감과, 환자가 내게 이 수술을 받겠다고 먹고싶고 쓰고싶은 것을 견뎌왔을 시간의 무게, 그리고 부모 손 빌리지 않고 스스로 성실히 청춘을 일터에 바쳐온 대견함이 뒤죽박죽으로 날 엄습했다.

정신을 차리고, 필자는 다시 통장을 남자에게 건넸다.

통장잔고는 우리 병원의 돌출입수술 비용에 턱없이 모자랐다.

-알겠어요. 수술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수술하고나면, 어떻게 생활하려구요?

-...

-제가 여기서 한달 생활비를 빼고 나머지만 수술비로 받겠습니다.

얼마를 생활비로 남겨드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필자의 수술비는 재료비보다는 작품료가 대부분인 셈이다. 그러니 작품을 얼마에 내놓고 싶은지는 작가 마음이다. 그러나, 자신이 열정과 정성을 들인 자식같은 작품을 헐값에 내놓고 싶은 작가는 없다. 그리고, 가치있는 작품이 더 비싸다.

환자가 수줍게 그러나 용기 있게 내민 통장이 날 감동시켰다.

삶에는 계산기로 계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결국, 필자가 그 환자에게 ‘헐값’에 수술을 해준 셈이 되었지만, 내가 만들어 드린 아름다운 돌출입수술의 결과는 환자의 정직함과 성실함의 후광으로 더욱 가치있게 빛날 것이다.



한 상 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준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발표, 강연

2018,2019 한국 및 타이완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초청강연

20년간 돌출입수술과 얼굴뼈 수술 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