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8]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154회> : 미용실에서

<미용실에서>


병원에 예약한 환자가 노쇼하는 바람에 갑자기 일정이 비었다. 며칠 전이었다. 이참에 머리나 깎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전화보다, 온라인 예약을 선호한단다

필자도 그쯤은 할 줄 안다. 스마트폰으로 온라인 예약을 하려했더니, 당일은 예약이 안된다. 그건 몰랐네...하는 수 없이 미용실에 전화를 했다(사실 속이 더 시원했다). 30분쯤 후에 도착하는데 커트 가능하냐고. 거기서 추천한 디자이너로 전화 예약을 하고 병원 문을 나섰다. 내가 단골인 디자이너는 하필 그 날 휴무였다.

다른 중요한 일로 통화하며 가고 있는데, 성가시게 자꾸 전화가 온다. 미용실이었다. 애타게 날 찾는 게 뭔가 불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디자이너의 앞 순서 예약 손님이 늦게 와서, 내 머리 커트 시간을 더 미루든지, 아니면 두 배 비싼 원장에게 깎으라는 것이었다. 신종 피싱인가

“그럼 몇 시쯤 갈까요?” 그냥 예약했던 그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자를 생각이었다. 예약시간을 30분 정도 미루는 게 오히려 내게도 좋았다. 들렸다 가면 딱 좋을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시간보다 5분 정도 늦게 미용실에 도착했더니, 데스크에서 “예약시간보다 좀 늦게 오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안내한다.

자주 가던 곳이라, 원래 제 시간에 가도 잠시 앉아 대기하도록 하는 걸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예약시간보다 늦게 와서’라는 단서를 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금부터 커트 시간이 늦어지는 건 당신 책임이라는 덤터기 냄새가 난다. 내 앞 손님 머리가 아직 다 안 끝났을 거라는 내 직감이 맞다면, 설령 5분 일찍 도착했더라도 바로 내 머리를 해줄 수 없었을 테고, 사실은 내가 좀더 늦게 왔으면 싶었을 것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샴푸 먼저 하실 게요.” 나는 디자이너가 손님의 평소 머리 스타일을 보지도 않고, 조수에게 머리부터 감기게 하는 것이 영 마뜩잖다. 이는 CT로 뼈 모양만 보고 돌출입 수술하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머리를 감기는 여자 조수는 특별했다. 저 세상 샴푸를 경험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남의 머리를 정성껏 감겨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자기 배에서 나온 갓난아기도 그렇게 정성들여 씻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거품을 내고 머리칼을 쓰다듬고 마사지를 하고 지압을 하고 목근육까지 풀어주는 과정이 고요함 속에 종교의식처럼 이어졌다. 마사지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잠이 올 지경이었다

드디어 물로 샴푸를 씻어내나 했더니, 다시 트리트먼트를 해주겠다면서 이제까지 한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젠 약간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안대로 눈을 가려놓았으므로 뭘 볼 수도, 할 수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오랫동안 머리카락을 비눗기와 물에 불려본 적은 없었다. 다 불어터져 못 먹게 된 라면, 그리고 뜨거운 물에 집어넣어 털이 다 뽑힌 생닭이 번갈아 떠올랐다.

머리 감는 시간이 30분에 가까워지자 뭔가 촉이 왔다. 앞 손님의 머리가 아직 안 끝났다는 심증이 굳어졌다. 디자이너가 조수에게 내 머리를 최대한 천천히 감기라고 지시 했을 것이다. 내 눈을 안대로 가려놨으니, 아마 중간에 ‘10분 정도 더 감겨’ 라는 지시사항을 메모지에 써서 조수에게 보여줬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머리를 깎기도 전에 그렇게 오랫동안 정성껏 샴푸를 할 일이 있을까

좀 재미있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못 참고 물었다. “내 앞 손님 머리가 아직 안 끝나서 이렇게 오래 샴푸하는 거죠? 솔직히 말해도 돼요.” “아~아니예요. 저희 팀은 원래 이렇게 해요.” 당황하는 눈치였다. 정성껏 꼼꼼히 머리를 감겨도 정도가 있지...매일 모든 사람의 샴푸를 이렇게 한다면 조수 직원의 지문이 뭉개질 것 같았다

드디어 샴푸가 끝났다. (좋아하지도 않는) 1시간짜리 마사지 풀코스가 끝난 느낌이었다. 이윽고 디자이너가 나타났다. (최대한) 웃으며 “이제, 앞 손님 가셨어요?” 직격탄을 날렸더니, 순진한 디자이너는 해맑게 “네, 방금 가셨어요.”한다. 심증이 자백을 통해 확증된 순간이다.

커트가 마음에 들었다면, 샴푸는 예정에 없던 신비체험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커트가 별로였다. 샴푸에 대해 디자이너도 같은 말을 했다. 자기네 팀은 꼼꼼하게 장시간 샴푸와 마사지를 해준단다. 그게 좋아서 오는 단골 고객도 있는 모양이었다. 긴 시간의 샴푸가 차별화 전략이라니...헤어컷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디자이너가 쓸 데 없는 기억을 해냈다. 여전히 해맑았다

“고객님 생각났어요. 전에 저한테 딱 한번 커트하셨는데, 그 때 드라이해 드린 게 마음에 안 드신다고...드라이기 달라고 하셔서 직접 드라이 하셨었어요...

! 나도 생각이 났다. 최악의 기억이었다. 명색이 디자이너인데 롤빗과 드라이기를 들고도 내가 원하는 머리를 ‘디자인’ 해내지 못하다니. 이게 만약 성형수술이었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과 딴판의 얼굴이 나온 환자의 마음은 정말 얼마나 속 터질 것인가?

‘이번 커트는 틀렸다’고 속으로 포기를 했다. 나의 단골 디자이너에게 미리미리 예약해두지 않고 갑자기 무계획적으로 아무한테나 머리를 자른 내 책임이라고 치자. 디자이너가 손보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어서 내가 답할 때마다 디자이너는 이발기(헤어 클리퍼)를 갖다 댔고, 그 때마다 조금씩 더 마음에 안 들게 바뀌었다. 여기서 그만 중지해야만 한다!

-, 이제 됐습니다. (마지못해) 좋네요.


이제 그만 미용실을 나가고 싶었다. 저녁 약속 시간도 가까워오고 있었다. 이때 조수 여직원이 말한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아. 저 세상 샴푸가 남아 있다.

샴푸를 하러 가는 길이 약간 두렵기는 처음이다. 간곡하게, 가볍게 샴푸해달라고 말했지만, 빨리 끝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드는 커트와, 장시간의 정성스런 샴푸라...기묘한 조합이었다. 최악의 수술에 최고의 붕대가 무슨 소용이 있나

하지만, 머리카락은 다시 자란다. 샴푸를 시켜준 여직원은 죄가 없다. 무슨 일이건 그렇게나 정성일 수 있다는 것만큼은 감동적이었다. 그 여직원에게 팁을 좀 쥐어주고 미용실을 나와, 셀카 모드를 켜니 이발소에서 갓 머리를 자르고 나온 듯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다.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법이 뭐가 있던가?

다시 겪기는 싫은 경험을 하면서, 내가 미용실에 머리를 맡기는 상황과, 환자들이 내게 자기 얼굴을 맡기는 상황을 비교해보게 된다. 뭔가 배우는 게 있을 것이다.

첫째, 머리 깎는 것과 돌출입수술(혹은 성형수술)은 그 목적이 멋지고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라는 점이 같다. 반면에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전자는 일생 수백 번 하게 되고 망쳐도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니 큰 상관없지만, 후자는 일생 한 번만 하는 게 최선이고 망치면 답이 없다는 것이다. 선택이 더 신중해야하는 이유다. 게다가, 수술은 합병증의 가능성에도 주의해야 한다.

둘째, 평소 머리스타일을 보지도 않고 샴푸부터 시킨 후 젖어서 착 가라앉은 머리만 보고 커트를 하는 것은, 얼굴뼈 성형수술로 치면 환자 얼굴은 보지 않고 CT로 뼈 모양만 보고 윤곽, 돌출입 수술하겠다는 것과 비슷한 넌센스다.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뼈모양이 아니라, 결국 그 위를 덮고 있는 살의 윤곽선이다

같은 논리로, 수술 후 CT를 보여주며 얼굴뼈수술이 아주 잘되어 있다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하다. 아무도 “넌 참 뼈가 미인이야”라고 하지 않는다. 절골이나 고정이 잘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 기본이며, 그것이 얼굴이 예뻐졌다는 것을 대변해주지 못한다. 만약 뼈를 잘못된 위치로 옮겨 단단히 잘 고정해 놓는다면 심미적인 결과는 참담하다

셋째, 불만족스러운 커트와 장시간의 정성스런 샴푸는, 성형수술은 엉터리로 해놓고 드레싱[붕대 등으로 상처를 감싸는 것]만 기막히게 멋지게 해놓은 것과 다르지 않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드레싱에 정성을 쏟는 것은 수술에 확신이 없는 집도의의 자가 심리요법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샐러드의 드레싱도 마찬가지다. 신선하지 않은 야채를 드레싱으로 가릴 수는 없다.

넷째, 남의 아름다움을 책임지는 사람이 감각과 솜씨가 부족하면 헤어컷이든 성형수술이든 민폐가 되고 만다. 자기가 진정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이로운 일이다.

그런데 여담이지만, 어느 후배 의사가 해준 조금 씁쓸한 이야기. 아이러니컬하게도, 미적 감각과 수술 솜씨가 뛰어난 의사보다, 그렇지 못하고 대신에 경영 감각과 홍보 수완 좋은 의사가 병원을 더 크게 키우고 여러 의사를 고용하는 최고경영자가 되어 큰 부자가 된다고 한다

오늘도 돌출입이나 광대뼈, 사각턱을 가진 사람의 얼굴뼈에 정교한 톱질을 하며 산다. 수술에 몰입하는 시간이 즐겁다. 나는 비록 조그만 병원에서 홀로, 도자기 빚는 장인처럼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수술이나 하는 사람이지만, 나를 믿고 찾아온 환자들이 평생 자신감 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나게 해주는 일을 내 보람이자 행복으로 여기며 살고 싶다.

헤어컷은 망쳐도 다시 자라고, 도자기는 깨부수고 다시 빚으면 되지만, 소중한 당신의 얼굴이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상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2018, 2019, 2022, 2023년, 한국 및 대만, 일본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강연

2022년 SCI급 미국성형외과학회 공식학술지(영향력지수 IF=5.169)에 돌출입논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