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1]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160회> : 방망이 깎던 노인


<방망이 깎던 노인>



<방망이 깎던 노인>은 1974년 발표된 작가 윤오영의 수필 제목이다. 필자가 학생 때는 국어 교과서에 없었는데, 이후 교과서에도 실렸다고 한다. 방망이는 다듬질(다듬이질)을 하는데 쓰는 도구다. 다듬잇돌 위에 풀을 먹인 옷감을 얹은 후, 주름을 펴고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다듬잇방망이로 두들기는 것이다. 아마 요즘은 다듬이라는 것을 본 적도, 그 청명한 소리를 들은 적도 없을 것이다.


(사진출처 : 구글)


줄거리는 이렇다.

“나는 동대문 길가에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에게 방망이 한 벌을 주문했다. 무뚝뚝한 노인은 차 시간 때문에 재촉하는 내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미 다 되어 보이는 방망이를 깎고 또 깎았다. 결국 차를 놓친 나는 상도덕도 모르는 불친절한 노인이 불쾌했고, 속으로 ‘그 따위로 해서 장사가 될 턱이 없다’고 악담을 했지만, 집에 와 방망이가 너무 예쁘고 좋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내 태도를 뉘우쳤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과 생계를 떠나, 물건을 만드는 순간만큼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그것에만 열중하고 심혈을 기울여 보람을 느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방망이 깎던 노인과 같은 사람들이 나 같은 젊은이의 멸시를 받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물건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노인에게 사과를 하러 동대문을 다시 찾아갔지만 노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노인이 서 있던 자리에서 동대문의 추녀 끝으로 피어나는 흰 구름을 보며 도연명(陶淵明)의 시구를 떠올렸다.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다가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
 

 

성형외과를 개원한지 몇 년 안 된 S대 후배가, 어느 모임에서 내게 인사를 한다. 

-저는 S대 병원 성형외과 레지던트 시절부터 형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전설 같으신 분을 직접 뵈어서 영광입니다.

사회생활 잘하는 후배다. 듣기 좋은 말로 짐짓 과장했겠지만, 사실 전설 같은 건 없다. 소박하게 1인 성형외과 열고 사는 필자에게 무슨 대단한 전설이 있으랴. 

그나마 만약 후배들에게 구전되는 이야깃거리가 있다면, 1인 의사 성형외과로 돌출입수술에 몰입하고 집중해서 수십 년을 버틴다(?)는 것, 혹은 돌출입수술은 기가 막히게 한다는 것 아닐까?

후배가 전공의 시절, 꽤 나이 차이 나는 선배인 나의 근황을 알고 있었던 것은, 지금은 작고하신 어느 교수님이 늘 “한 가지라도 잘해라”며, “너희 선배 중에 돌출입수술 하나만 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셨기 때문이란다.

사실은 좀 다르다. 필자는 돌출입수술 하나만 하는 건 아니고, 보통 턱끝수술, 광대뼈, 사각턱수술을 동시에 한다. 눈, 코 수술도 좀 한다. 하지만, 주종목, 특기 종목이 돌출입수술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이엔드의 세계에서도 미세하게 더 잘하는 종목이 있다. 수영을 한국에서 제일 잘한다는 항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황선우도, 자유형 200미터가 주종목이다. 같은 아시안게임 남자 자유형 50m에서는 지유찬 선수가, 접영 50m에서는 백인철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이어지는 역설(逆說).

-형님, 제가 몇 년 간 개원해서 보니까, 수술을 너무 잘하는 사람은 큰돈을 못 버는 것 같습니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고 나도 대부분 궤를 같이해왔던 생각들이다.

돈을 많이 벌려면, 기업형 병원을 만들어서, 수십 명의 의사와 수백 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메가톤급 홍보, 공장형의 대량수술을 통해 대량매출을 이루어내고 이런 구조를 통해 빌딩을 사서 건물 전체를 병원으로 만드는 것이 전형적인 성공담이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한 경영 능력이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자신이 수술을 너무 잘하면 다른 의사들을 페이닥터로 들이지 못한다.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강할수록 더 그렇다. 환자들에게 최선의 결과로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고, 그걸 나만이 만들어줄 수 있다는 장인(匠人)정신과 자부심이 확고하면, 다른 사람의 손에 환자 얼굴을 (일부라도) 맡기지 못하게 된다. 

손이 나만큼 좋은 페이닥터를 고용하면 되지 않나? 다음의 이유로 어렵다. 

일단, 처음부터 손이 좋을 수 없다. 도제(徒弟) 방식으로 스승 밑에서 도자기 굽는 것을 배우는 제자는, 처음부터 도자기를 스승만큼 만들어내지 못한다.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시행착오의 결과로 잘못 만들어진 도자기는 깨버리면 그만이지만, 환자에게 시행착오를 겪게 하면서 내 후계자를 키울 수는 없다. 망가진 환자 얼굴은 누가 책임지나?

운 좋게, 애초부터 손이 좋고 센스 넘치는 페이닥터를 내 밑에 들였다고 가정하자. 생각보다 빠른 학습곡선(learning curve)으로 환자들에게 시행착오의 피해를 거의 주지 않고, 내 돌출입수술과 윤곽수술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였다고 치자.

그러면, 그 페이닥터는 십중팔구 곧 내 곁을 떠날 것이다. 나와 비슷한 수술실력이 되기도 전에 꿀 이득만 챙겨서 독립한다. 수업료 받긴 커녕,  돈(월급) 주고 가르쳐준 셈이다. 핵심 기술을 웬만큼 알고 나면, 봉급 받아가며 누구 밑에 있기 싫어지고 보따리 쌀 궁리만 하게 된다. 의리보다 돈. 어찌 보면 참 비정한 세계다. 게다가, 따로 독립하면, ‘돌출입 전문’이라고 써 붙이고 돌출입수술의 대가를 자처하며, 수술비는 나보다 싸게 책정해서 결국 스승 발목 잡는 병원이 되고 말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셈.


한편, 수술하는 자기 손이 시원찮은 걸 알고 있거나, 수술에 몰입하는 게 괴롭기만 한 사람은 자기가 직접 수술하기보다 페이닥터를 고용하고 병원 경영에 눈을 돌리기 쉽다(사실 손이 안 되는 사람이 수술에 몰입하는 게 더 재앙이다). 환자 수술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인재 경영하는 기업 총수가 되는 것이다. 단, 이렇게 '회장님'이 되어도 속내는 복잡할 것이다. 과연, 고용한 페이닥터 모두가 (자기 이름 건 병원도 아닌데) 밀려드는 환자에게 한결같이 최고 수준의 수술결과를 만들어낼 열정과 수술 실력이 있을까?


후배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평생...송구스러운 표현이지만, 형님처럼 방망이 깎는 노인으로 살아갈지, 병원 외연을 키워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내가 일생을 바치고, 또 환자의 일생도 꽤 바꾸어준 돌출입수술이 (한낱) 옷감 두드리는 방망이에 비유되는 것도 좀 별로지만, 그래도 일단 장인정신으로 방망이 하나 열심히 깎듯 내가 돌출입수술을 열정적으로 해 온 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노인’은 아니지 않은가? 수필 제목이 방망이 깎는 아저씨였으면 좀 나았을 텐데...생각하며 달력을 보니 이제 곧 연말이고 새해다. 한 살 더 먹을수록 점점 노인에 한 발짝씩 가까워지겠구나...털썩.

사실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수필 전문은 최근에야 읽어봤다. 수필 속 무뚝뚝한 노인이 장인정신을 발휘해서  결국 명품 방망이를 탄생시킨 것은 맞겠지만, 필자의 수술과 다른 점들이 있다.

첫째, 마냥 늑장을 부려서는 안 된다. 

수필에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마냥 늑장을 부리는 수술은 대개 실패다. 원하는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니 한없이 늦어지는 것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손이 무디고 거칠면 수술이 늦어진다. 그리고 환자가 마취되어 있는 상황에서 수술을 마냥 오래해서도 안 된다. 

반대로, 아주 빠른 수술이 최선인 것도 아니다. 필자는 상악, 하악의 돌출입수술을 단 33분 만에 끝낸 무편집 영상을 찍고, 그 밑에 이렇게 썼다. ‘사실 빨리빨리 수술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환자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손이 빠르고 정교할수록 수술이 빠른 것이 사실이지만, 수술 실력이 어느 수준에 올라가서 환자에게 좀 더 해줄 수 있는 게 많아지면, 수술시간은 다시 약간 늘어나게 된다. 단, '약간'이다. 마냥 늑장을 부려서는 안 된다.


둘째, 무뚝뚝해야 고수는 아니다.

더 깎지 않아도 되니 그냥 달랬다고, 반말로 화를 버럭 내는 노인의 퉁명스러움과 무뚝뚝함이 수필가에게는 명문의 재료가 되었지만, 사실 그 분야 최고수(最高手)라고 해서 환자나 고객에게 퉁명스러워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시대는 지났다. 모 대학병원에서 누구에게나 무조건 반말을 해도 잘 나갔던 교수는, 그게 30여 년 전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방망이 깎던 노인의 장인정신은 존경할만하지만, 퉁명스러움과 무뚝뚝함 대신 휴머니즘과 유머, 공감능력을 가져야 환자에게 진정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고3 에게도 반말은 하지 않는다.

벌써,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온다.
후배의 고민을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제 어떠한 퇴로도 없이, 방망이 깎는 노인으로 늙어갈 것인가?  

방망이 대신 뼈를 깎지만, 나는 돌출입수술, 얼굴뼈 수술이 즐겁다. 내 영혼과 육체를 갈아 넣어 수술에 몰입하는 것이 기쁨이다. 환자들의 고민과 두려움, 의심마저도 귀담아 들어주고, 수술 결과로 증명해주는 것이 보람 있다. 환자들의 삶을 바꿔주고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것이 행복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정말로 노인이 되어, 손이 떨리고 거동마저 어렵게 된다면 수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날이 오겠지. 그 전에 무덤에 가지고 들어가기엔 너무 아까운 나의 돌출입수술을 누군가에게 손잡아 전수할 기회가 있을까? 한 가지 위안은, 1907년생인 수필가가 ‘나 같은 젊은이’라고 쓴 그 때 나이가 68세다. 오! 50대인 나는 아직 청년이구나.

수필가는 노인을 다시 찾아 추어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하려고 했으나 노인이 그 자리에 없어 허전하고 서운했다고 썼다. 추어탕에 탁주의 맛은 필자도 낯설지만, 돌출입과 윤곽수술을 받은 환자가 너무 감사하다며 오늘 선물해준 직접 구운 쿠키의 세상 달콤한 맛을 음미하며, 다시 정성들여 방망이 깎듯 돌출입수술을 하러 들어갈 시간이다.





한상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2018, 2019, 2022, 2023년, 한국 및 대만, 일본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강연
2022년 SCI급 미국성형외과학회 공식학술지(영향력지수 IF=5.169)에 돌출입논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