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9]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117회> : 라면


라면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그래서, 라떼 말고, 라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남자주인공이 의사였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배경인 그 1994년 경, S대 병원의 내과 병동 입원실이 줄지어 있는 복도 중간 쯤에는, 간호사들이 앉아 컴퓨터 자판이 아닌 볼펜으로, 종이로 된 환자 차트를 기록 중인 간호사 스테이션이 있었다.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창가에 아담한 공간이 있고, 벽에는 환자 현황을 수기로 적은 칠판이 붙어 있다.

철제 테이블 주위로 필자를 비롯한 본과 3학년 학생들이 둘러앉아 있고, 그 앞에서 백발의 노교수님이 담배를 척 하나 피워 물고 환자의 질환과 치료에 대한 짧은 강의를 해주셨다. 줄담배인 H교수님의 세부전공은 폐질환(pulmonology;호흡기내과)이었다. 환자에게는 담배 절대 피지 말라고 한다며 씨익 웃으시던 교수님의 인생 이야기도 녹아있었던 강의. 이런 강의를 속칭 베팅(베드사이드 티칭; bed-side teaching)이라고 불렀다. 환자의 입원침상 곁에서 하는 강의라는 뜻이다.

옵세(obsessive의 약어; 강박적으로 공부에만 몰두하는 의대 학생을 가리키는 은어)들은 특종을 취재하는 기자처럼 교수님의 말을 한 글자라도 빠질세라 스프링노트에 받아 적었다. 여담이지만, 진정한 옵세는 노트 필기한 것 좀 복사하자는 학우들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다.

자기에게 배당된 환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실습학생에게는 큰소리가 나고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교수들 중에 가장 무섭다는 신참 교수(주니어 스태프) B였다. 그가 복도 끝에 출현하면 레지던트와 학생 모두 긴장했다. 소문대로 정말 독하고 매서운 호랑이였다. 학생은 말로 혼내 울리는 정도였지만, 레지던트들은 쇠로 된 차트로 얻어맞기 일쑤였다.

돌이켜보니, S대 병원에서 본과 3, 4학년 임상실습을 할 때, 그 곳엔 호랑이도 있었고, 담배도 있었다. 지척에 환자 입원실이 있는 개방된 공간에서 교수가 담배를 피울 수 있다니 꿈같은 이야기다. 요즘은, 교수가 레지던트를 꾸중하면서 신체를 학대했다가는 감옥 갈지도 모른다.

병동에서 담배 피던 H교수님은 폐암으로 고인이 되셨고, 호랑이였던 B교수님은 정년퇴임을 하셨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다.

병동에서 교수가 담배를 피우는 게 가능하던 시절이었으니, 의국(해당과 교수와 레지던트들의 교육, 연구, 사무를 위한 집합체, 또는 그것을 위한 장소. ‘교실’이라고도 칭함) 사무실에서 라면을 끓여먹는 것 정도는 애교였다. 의국 사무실은 병동과 멀찌감치 떨어진 외딴 공간에 있었으니 환자 입원실에 라면 냄새가 풍길 일은 없었다.

필자는 라면을 너무 좋아한다. S대 병원 성형외과 레지던트 시절, 의국 사무실에서 허접한 플라스틱 냄비에 물과 봉지 라면, 스프를 넣고 몇 분간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끓인 라면 보다 더 쫄깃쫄깃한 특급 라면이 만들어졌다. 그 때의 라면 맛은 이상하게도 다시 재현이 되지 않는다. 전자레인지의 마이크로파 진동수가 달라서인지, 누가 쓰다 버린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플라스틱 냄비의 마법이었는지, 서울대병원을 흐르는 수돗물 물맛 때문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계란도 없고 파도 없었지만 꿀맛이었다. 활동량이 슈퍼맨보다 많아 항상 배고픈 레지던트의 고달픔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치나 단무지 같은 반찬은 전무했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 라면을 먹었다. 당시 20대 후반인 레지던트들보다 나이가 많은 누님뻘부터 갓 스무 살까지의 의국 비서 직원 서너 명은, “쌤, 또 라면 먹어요? 어제도 먹었잖아~!”하고 신기해하면서, 한편 천천히 먹으라며 애처로워했다.

라면 좋아하는 입맛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출출하다 싶을 때는 라면 생각부터 난다. 특히 초집중하는 수술을 끝내고 나오면 배가 고프다. 한 시간짜리 돌출입수술만 하고 나오면 별로 안그렇지만, 돌출입수술에 광대뼈, 사각턱 수술까지 세 시간 넘게 집중해서 수술을 하고나면 허기진다. 병원에는 달리 먹을 간식도 없고 컵라면에 손이 간다.

사실 라면은 그 가치가 평가절하 되어 있다. 파스타나 우동, 쌀국수에 비해서 특별히 건강에 해롭게거나 문제가 되는 성분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파스타 한 접시를 사 먹으려면 2만 원이고 라면 한 그릇은 이삼천 원이다. 정통 이탤리언 레스토랑에 가서 파스타를 시키면 깜짝 놀랄 정도로 짠 경우도 있으니, 건강에 해로운 나트륨 함량도 라면 못지않을 것이다. 대개, 파스타를 파는 곳은 인테리어가 고급지고 좋은 옷 입고 데이트하러 온다. 파스타 값에 인테리어 값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라면 파는 곳은 대개 인테리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고, 지나가다가 끼니를 때우러 들어온 손님이 대부분이다. 여담이지만, 왜 내가 집에서 끓인 라면보다 밖에서 사먹는 라면이 더 맛있는지는 수수께끼다.

라면은 끼니를 쉽고 싸고 간단하게 때워줄 수 있는 음식을 대표한다. 코로나 시국에서 일과 시간에 쫓겨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의료진은 영웅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컵라면을 먹었다고 비난을 받아 장관직에서 물러난 일도 있었다.

2013년 세계 인스턴트 라면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1년간 한국의 라면 소비량 36억개, 1인당 소비량 74개라고 하며, 이쯤 되면 라면은 국민 음식인 셈이다. 온 국민이 평균적으로 5일에 한 번씩 라면을 먹는 셈이며, 세계적으로도 한국 사람의 라면 소비 개수는 인도네시아(1년에 1인당 52개)를 한참 앞지르는 부동의 세계 1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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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입수술을 끝내고 나왔는데, 점심식사가 너무 부실했는지 허기가 엄습했다.

법복을 입은 판사님은 떡볶이 같은 건 안 드실 것 같고, 여신과 같은 연예인은 화장실도 안갈 것 같지만, 먹고 사는 일은 비슷한 데가 있다. (환자나 보호자의 눈을 피해) 컵라면을 하나 만들어 먹고 있는데, 상담할 신환(新患)이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는 콜이 온다. 환자를 기다리게 하기 싫어서 덜 익은 라면 국수만 대충 건져 먹고 진료실로 간다.

필자를 찾아온 환자는 이미 다른 곳에서 양악수술을 받은 환자다. 그런데 차트를 확인해보니 타병원에서 양악수술을 받기 전에 이미 필자를 찾아왔던 기록이 있다. 당시 사진으로 보면 너무나 전형적인 돌출입과 무턱인데, 돌출입수술(ASO)과 턱끝수술을 하면 된다는 필자의 말을 듣지 않고, 기어코 양악수술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돌출입이 거의 그대로여서 다시 필자를 찾았다. 한숨이 나왔다. 환자도 한숨을 쉬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어쩌다가 결국 양악수술을 하게 되었나요?

-그게...그쪽 원장님은 돌출입수술을 하면 반드시 합죽이가 된다고 하셔서요. 양악수술을 해야 합죽이가 안 된다고요.

-하아...

한숨이 멈추질 않았다. 엑스레이를 보니 턱끝은 꽤 많이 전진수술을 해놓은 상태인데도, 입은 여전히 나와 보인다.

그녀는, 합죽이가 안 되는 데는 (너무나) 성공했지만, 돌출입이 들어가는 데 실패했다. 물론 양악수술로 해결 가능한 돌출입도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이 환자의 경우는 아니었다. 양악수술로 돌출입을 넣으면, 인중상부는 덜 들어가고 앞턱끝은 불필요하게 뒤로 들어가기 쉽다(그래서 턱끝을 전진시키게 된다). 양악수술은 태생적으로 아래쪽으로 갈수록 더 많이 뒤로 들어가는 회전형의 상하악 이동이 일어나는, 주걱턱수술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주걱턱에서는 양악수술을 시행한다. 양악수술이 나쁜 수술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어떤 돌출입에서 양악수술과 돌출입수술이 둘 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안전성과 효율성, 가성비, 환자의 수월함 등 여러가지 면에서 돌출입수술(ASO)이 더 유리하다는 게 필자의 20년간의 임상적인 경험에 의한 판단이다.


합죽이에 관해서, 라면을 좋아하는 필자에게 딱 알맞은 비유가 생각났다.

돌출입수술을 하면 반드시 합죽이가 된다는 것은, 라면을 끓이면 반드시 짜다와 비슷한 이야기다. 라면을 끓일때 물을 더 많이 넣을 수도 있고, 분말스프를 덜 넣을 수도 있으며, 국물을 안 먹을 수도 있다.

짠 맛은 절대 싫은데, 미련하게 분말스프를 다 넣거나, 물을 부족하게 끓이거나, 짠 라면을 국물까지 마시고 나서, 역시 라면은 짜서 문제야....라고 말한다면 참으로 한심하다. 짜게 안 만드는 것은, 조리를 하는 개인의 능력이지, 라면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오죽하면, 라면 봉지에도 이렇게 쓰여 있다. ‘나트륨 섭취를 조절하기 위하여 기호에 따라 적정량의 스프를 첨가하여 조리하십시오(출처;N사의 라면)’

돌출입수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돌출입수술은 치아 4개를 발치하고 그 공간을 이용해서 앞의 6개 치아와 잇몸뼈를 절골하여 후방이동시키는 수술이다. 너무 많이 뒤로 집어넣으면 합죽이가 된다. 물론 최상급의 돌출입은 발치공간을 전부 다 쓴다.

합죽이를 안 만들고 싶다면, 잇몸뼈(와 치아)를 발치한 공간만큼 다 밀어 넣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밀어 넣으면 된다. 스프를 덜 넣거나 물을 더 많이 넣어 조절하는 것과 같다. 미련하게 발치한 공간만큼 다 집어넣고 합죽이가 되니, ‘돌출입수술은 합죽이가 되는 수술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라면은 짜서 못 먹을 음식이라는 투정과 다를 바가 없다. 안 짜게 끓이면 될 일이다. 물론, 마음으로는 합죽이를 안 만들고 싶었어도 수술 계획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집도의의 눈과 손이 무디거나 거칠어 과도하게 들어갔을 수 있다.

한편, 라면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1인 가구가 늘고 혼밥도 흔해지면서 부가적인 수요가 생겨났을 것이다. 아주 매운 불 맛, 치즈 맛, 부대찌개 맛, 미역국 맛, 마라탕 맛 라면 등등 신제품이 넘쳐난다. 멋져 보이고 새로운 수술명과도 비슷하다. 내시경 윤곽수술, 레이저 돌출입수술, 뼈를 안 자르고도 돌출입을 넣을 수 있다는 미니양악이나 3차원 지방주입 등 그럴 듯 한 수술명칭들이 많다.

그러나, 결국 수십 년간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는 라면은, 국내 몇 개 회사에서 나온 클래식한 라면이다. 그것이 가장 전형적이고 전통적이고 자연스럽게 오랜 기간 우리의 미각을 사로잡는다. 물론 입맛과 트렌드에 따라 맛이 미세하게 변화 해왔을 것이다.

이 역시 필자가 하는, 특별한 이름이 없는 ‘무제(無題) 돌출입수술’의 지향점과 일맥상통한다. 더 튀고, 더 눈에 띄고, 더 장식적인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생명력이 짧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힘 있는 아름다움이다. 돌출입, 광대뼈, 사각턱 수술에 있어서도 골드스탠다드한 아름다움의 큰 줄기 안에서 트렌드와 개인취향을 조금씩 반영한다.


돌출입수술을 (잘못)해서 이미 합죽이 환자를 만들었던 트라우마가 있거나, 환자에게 돌출입수술을 하면 합죽이가 된다는 위협을 가하거나 혹은 그런 경고를 들은 분들에게, 어느 작가의 라면 조리법을 소개한다


작가 김훈은 그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이렇게 적었다.


‘물은 500 ml(3컵) 정도를 끓이라고 포장지에 적혀 있지만, 나는 700 ml(4컵) 정도를 끊인다. 물이 넉넉해야 라면이 편안하게 끓는다. 수영장이 넓어야 헤엄치기 편한 것과 같다. (중략) 라면을 끓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국물과 면의 조화를 이루는 일이다. 이것은 쉽지 않다. 라면 국물은 반 이상은 남기게 돼 있다. (중략) 식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조리할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수프를 보조로 삼는다.’


분말스프를 3분의 2만 넣을 수도 있고, 반만 넣을 수도 있듯이, 돌출입을 조금만 넣을 수도 있다. 발치공간의 일부만 이용해서 합죽이 아닌 자연스러운 입매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돌출입수술을 하면 무조건 합죽이가 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라면은 너무 짜니 우동이나 쌀국수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돌출입수술은 합죽이가 되니, 양악수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이다. 의사는 정확한 지식과 정직함이 생명이다. ‘나는 라면을 잘 못 끓인다’고 해야 할 것을, ‘라면은 너무 짜게 잘못 만든 것’이라고 하지는 말자.

양악수술로 고생도 하고 비용도 잃고, 정작 입은 안 들어간 안타까운 환자와 한숨 섞인 긴 상담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오니, 국수 조각들이 남은 컵라면 국물은 차게 식어있다. 아까는 분명히 허기졌고 라면도 먹다 만 셈인데, 이상하게 하나 더는 못 먹겠다. 라면이 아무리 좋아도 한 번에 컵라면 두 개를 먹기는 어렵다.

그 환자는 결국 필자에게 다시 돌출입수술을 받았다. 양악수술로 빼 버린 치아가 없다는 게 그나마 유일한 위로다. 당신의 얼굴에 하는 돌출입과 얼굴뼈 수술도 일생에 두 번 하게 될 일이 없기를 빈다.






한 상 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준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발표, 강연

2018,2019 한국 및 타이완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초청강연

20년간 돌출입수술과 얼굴뼈 수술 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