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6]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125회> : 지병

<지병>


지병의 사전적 뜻은 ‘오랫동안 잘 낫지 않는 병’이다. 요즘도 신문 부고란에는 ‘지병으로 별세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 나이 되면 피부 관리 좀 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로 친한 후배 피부과전문의를 찾아갔다. 이번에는 내가 환자가 되었다. 침상에 누워만 있으면, 내 얼굴에 누군가가 무얼 발라주고 닦아주고 시술해주고 하는 느낌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온전히 날 위한 시간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좋고 편한 상태라는 것은 역으로 나에게 그걸 해주는 사람은 힘들고 불편한 상태라는 반증일 수도 있다. 시술을 마치고 후배 원장에게 수고했다고, 힘들었겠다고 덕담을 하자, 그런 시술 하루 종일 하다보면 어깨도 아프고 손에 쥐도 난다며 웃었다.

직업군마다 지병이 있다.

필자는 거의 모든 수술을 환자 입 안을 통해서 한다. 돌출입수술은 물론이고, 광대뼈수술, 사각턱수술도 입을 통해 한다. 치과의사의 직업병이 목디스크라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입을 통해 더 깊은 곳까지 더 오래 들여다봐야 하므로 목과 허리의 긴장도가 한층 더 높다. 따라서, 목과 허리의 통증이 가장 큰 지병이다. 밝은 헤드램프 빛을 비추며 수술하기 때문에 눈의 망막 피로도 역시 높다. 수술이 끝나고 나면 세상이 어둡게 느껴진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정신적 유해요인에 의해 유발되는 산업재해나 직업병과는 조금 결이 다른 것이, 이처럼 오래 해온 일로 인해 조금씩 누적되어 생겨버린 지병은 사실상 예방할 수도 없고, 하소연할 곳도, 보상받을 곳도 없다.

며칠 전, 십수년간 내 치아 진료를 맡겨온 친구 치과의사가 허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당장 디스크수술을 하자고 했다며, 수술 여부를 상의하는 전화가 왔다. 한군데 더 가보라고 다른 병원으로 의뢰해 주었건만 거긴 가보지도 못한 채, 오늘 아침 119에 실려 갔단다. 급성 디스크 파열이 된 모양이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웃픈’ 이야기 한 토막. 필자의 병원에 휠체어가 하나 있다.

돌출입수술 후 화장실 갔다 나오던 환자가 기립성 저혈압으로 쓰러진 사건을 계기로 휠체어를 하나 구비했다. 환자는 의료진이 말리는 상황에서 화장실로 직행했고, 볼일 보고 나오다가 쓰러지게 되었는데, 다행히 해피엔딩이었지만 행여나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수술 후 화장실 행에는 가급적 휠체어를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사후약방문이라고 할 지 모르겠으나, 휠체어를 구비해놓은 성형외과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건강한 사람도 누었다가 갑자기 일어나면 가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주저앉게 되는 저혈압 증상을 겪기도 하며, 잠시 누워있으면 곧 회복된다.)





그 휠체어를 구비해놓은 이후로, 그 휠체어에 앉은 유일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필자였다.

어느 날, 그 날의 두 번째 수술이 끝날 즈음, 허리를 펼 수가 없이 아팠다. 구부정하게 겨우 걸어와 내 방에서 잠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는데, 마침 금요일 날 외식을 하러 가족들이 도착해 내 방문을 열었다. 반가운 마음에 일어서려고 했지만, 허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억지로 허리를 펴려니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이 엄습했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엉금엉금 바닥을 짚고 부축을 받아 겨우 휠체어 위에 앉았다. 새로 사서 한 번도 안 쓴 그 휠체어였다. 노년의 나를 체험해보는 느낌이었다. 가족들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다음 날, 척추 전문 병원에 가서 MRI를 찍어보니 요추의 디스크(추간판) 탈출증이었다. 허리뼈 근처에 긴 바늘의 주사를 두세 번 맞는데 의사인 나도 두려웠다. 편히 엎드려 있기도 어려웠지만 곧 허리에 긴 바늘을 찌른다는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피부과에서 대접받는 느낌과는 상극이었다.

이렇게 다른 병원의 환자가 되어보는 경험은 필자가 내 환자를 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환자에게 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 포근하고 안락한 진료 환경, 집도의의 실력이 주는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수술대에 올라가는 두려움, 잘못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잘 회복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느껴보면서 환자의 마음을 한층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나의 환자들은 마취가 되어 있어서 몰랐겠지만, 그 때 이후로 6개월 넘게 허리에 복대를 차고 얼굴뼈 수술에 들어갔다. 척추의 불안정성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삐끗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리를 단단히 감싸 매는 것이다. 허리에 시커먼 복대를 차고 있는 모습이 적잖이 모양이 빠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위에 수술가운을 입으면 안보이니 다행이었다.

자신의 얼굴이 불만족스러운 환자에게는 돌출입, 광대뼈, 사각턱이 (일종의) 지병과도 같겠지만, 그 지병을 고쳐주면서 나의 지병은 악화되기도 하고 재발하기도 한다. 환자를 보는데 자신의 건강을 갈아 넣는 것이 사실 의사의 숙명이다.


평생 훌륭한 인술(仁術)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질병과 싸워온 인의(仁醫)의 인덕(仁德)에는 물론 턱없이 못 미치겠지만, 성형외과 영역에서 필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진료는 환자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고, 불필요한 수술을 권하지 않으며, 환자를 돈 버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를 다하고, 마지막 한 바늘까지 최선을 다해 수술하는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성형외과 의사에게 미적인 안목과 수술솜씨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런 덕목들은 다 허사다.

가령, 마음씨 좋고 이해심 많은 의사 A, 신경질적이고 환자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의사 B가 쓴 감기나 고혈압 약 처방전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의사의 손이 흙손이든 악필이든 자판을 독수리타법으로 치든, 손재주나 미적 감각은 기초 질환을 진료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A, B 어느 경우든 대개 효과를 본다. 반면에, 환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친절하며, 합병증이 안 생기도록 최선을 다해서 수술한다는 성형외과 의사 C의 경우, 만약 결과적으로 수술 결과가 나쁘다면? 이건 정말 답이 없다. 성형수술은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비로소 인술(仁術)이다.

* * *

치과의사 친구가 허리디스크로 119에 실려 간 오늘, 필자는 근래 들어 처음으로 허리에 복대를 차지 않고 돌출입수술을 했다. 만성이 되어서 내 몸이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디스크 돌출부위 염증이 이제 완화된 것인지, 이제는 좀 살 만하다.

필자는 과거에 쓴 칼럼 <가을비 내리는 연못, 자하연>에서 ‘어떤 권위자라 할지라도, 처음에는 수술이 서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환자가 명의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썼었다. 당시에 10년을 지켜보다 나를 찾아왔다는 돌출입 환자에게, “잘하셨습니다. 10년 전보다 지금이 아무래도 더 낫겠지요.”라고 말했던 장면을 적었다.

그런데 이제 10년 후에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 같다.

대신 “제가 허리가 아파서, 수술을 오래 못합니다. 가장 중요한 메인(main) 부분만 제가 수술하고 나머지는 페이닥터가 합니다.”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위드(with) 코로나의 시기가 곧 올 것 같다. 뿐만 아니라 필자에게는 ‘위드 디스크’가 숙명인 듯하다. , 허리 통증과 같이 가야만 한다. 돌출입, 광대뼈, 사각턱수술을 하려는 환자가 이 글을 본다면, 행여 수술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환자의 막연한 불안감에 필자의 지병이 한 몫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제 허리가 많이 좋아지기도 했을 뿐더러, 행여나 수술하다가 갑자기 허리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환자의 수술만큼은 제대로 끝내 드리리라. 내 허리는 그 다음 문제다. 내게는 진통제도 있고 복대도 있으며, 만일의 사태에 내 허리 수술을 맡길 선배도 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척추기립근을 다시 강화할 수 있도록, 중단했던 운동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누구나 크고 작은 아픔이 있다. 필자뿐만 아니라 나의 환자들도 그렇다.

돌출입수술, 광대뼈, 사각턱수술을 내 손으로 해드린 환자 중에, 간경화, 유전병의 일종인 톰슨 병, 염증성 장 질환, 바이러스성 혹은 알콜성 간염, 혈소판 감소증, 재생불량성 빈혈을 가졌던 환자들, 과도비만으로 위절제술을 한 환자, 청각장애,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던 분, 치아가 총 두 개밖에 없던 돌출입 환자, 뇌동맥류 수술을 했던 환자, 잘못된 수술로 악결과를 가지고 살아온 분,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강박증 등 마음의 병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았다. 협착성 심장판막증을 가진 환자는 아직도 돌출입수술을 못 해드려 안타깝다.

이 분들에 비하자면, 몸이나 마음 어디 아픈 곳 없이 돌출입, 광대뼈, 사각턱만 가졌다면 상대적으로 축복받은 것이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아름답게 만들어드리려 한다. 환자에게나 의사에게나 건강한 게 가장 중요하고 감사할 일이며, 건강은 아름다움을 더 빛나게 한다.

추석 날 고속도로 빗길 교통사고 부상자를 돕던 진주의 한 내과 의사 선생님이 2차 사고로 고인이 되신 안타까운 기사를 접했다. 평생 선행을 베풀며 어질고 바르게 살아오신 분이라고 한다.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신체를 구하려 한 의인(義人)에게 진심어린 존경과 애도를 표한다.

성형외과 전문의인 필자에게 주어진 소명은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살려내는 것이다. 환자의 얼굴뼈를 아름답게 조각하다가 필자의 허리뼈가 닳아 주저앉는다 해도 결코 의인(義人) 소리는 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특히 돌출입으로 마음에 상처가 많던 환자들로부터 은인(恩人) 소리는 듣고 사니 다행이다.

행여 수술하다 허리가 갑자기 고장 난다고 해도, 병원에 아무도 쓰지 않는 휠체어가 있으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그걸 쓸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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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상 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준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발표, 강연

2018,2019 한국 및 타이완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초청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