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8]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121회> : 적당히

<적당히>


미국 야구 메이저리그에서 투수와 타자로 맞붙은 류현진과 최지만은 인천 동산 중, 고등학교 동문이고, 4년 터울의 선후배라고 한다. 각별한 인연이다.


오랜만에 고교 동문이면서 의대도 동문인 이비인후과 의사 후배와 메신저를 했다. 지금 어느 대학에 있냐는 필자의 질문에,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개원한지가 6년이 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좀 미안했다. 너무 격조했구나 생각했는데, 사실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필자가 나온 고등학교에서 서울 의대에 들어오는 학생이 한 명도 없은 지가 꽤 되었다. 속칭 ‘대가 끊긴’ 동문회는 활성화되기 어렵다. 신입생이 들어와야 신이 나고 모임의 이유도 성립한다. 정, 재계와는 달리, 의사들의 동문회 모임은 세력이나 계파를 형성하는 응집력도 없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환자 진료하는 사람들이라 그렇다.


코로나로 인해 생긴 변화 중 하나는, 감기 환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개원한 소아과, 내과, 가정의학과, 이비인후과 의원들이 힘들어한다. 의사가 항상 히포크라테스이길 원하는 대중들 입장에서는 아픈 환자가 없으면 좋은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개원한 그들에게는 환자를 보는 것이 생업이며, 그들도 식솔이 딸린 가장들이다.


후배에게 ‘요즘 병원이 한가해져서 좀 걱정이겠군...’이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돌아온 답문.

-뭐 그냥저냥 적당히 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하고 ㅎㅎ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서 유유자적하는 선비 같은 대답이었다.

‘그냥저냥 적당히’라...

문득 사전에서 ‘적당하다’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적당하다는 適當하다와 的當하다의 두 가지 한자가 있다. 전자는 정도에 알맞거나 엇비슷하게 요령이 있다는 뜻이고, 후자는 꼭 들어 맞다의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후자의 뜻풀이에는 예문조차 없다. 즉, 거의 모든 적당하다는, 전자인 適當을 사용하는 것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적당히 해~’ 에서의 적당히는 좀 대충 대충 하라는 뜻일 것이다. 송곳같은 질문에 ‘적당히’ 얼버무린다든지, ‘적당히’ 넘어갈 생각 말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고, 이비인후과 하는 후배의 ‘적당히’ 그냥저냥 하고 있다는 것도 대강 슬렁슬렁 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적당한 운동, 채소와 육류의 적당한 조합, 적당한 수면과 같은 말에서의 적당히는 어찌 보면 대충 대충과는 전혀 반대의 뜻으로 들린다. 같은 적당히가 너무 다른 어감으로 쓰인다.


같은 음을 지녔지만, 전혀 다른 뜻인 것이 더 있다.

‘노박 조코비치의 윔블던 3연패(連霸)’, 그리고 ‘텍사스 레인져스 양현종의 선발 3연패(連敗)’에서, 전자는 세 번 연달아 우승한 것이고, 후자는 세 번 연속 패배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왜 하필 정반대의 뜻을 가진 한자를 같은 음으로 읽게 된 것인지 의문이다.


사의를 표했다는 뉴스도, 맡은 일을 그만 두겠다(辭意)는 것인지, 감사의 뜻을 표했다(謝意)는 것인지 혼동되기 쉽다.


문맥으로 적당히 파악해야 한다.


* * *


얼마 전 돌출입과 사각턱수술을 하러 온 여자 환자가 수술 당일, 손글씨로 쓴 쪽지 한 장을 필자에게 건넸다.


‘존경하는 한상백 원장님’이라는 부담스러운 형용사로 시작하는 말머리를 본 순간, 뭔가 과도한 부탁이 있겠거니 싶었다.


-저는 기왕이면 누가 봐도 변했고 수술한 티가 나게 소위 빡세게 인형라인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각턱과 턱끝수술, 소위 돌려깎기를 ‘빡세게’ 해달라는 이야기다.

집도의로서 갈등하게 되는 순간이다. 아무리 성형수술이 환자에게 맞춤성형을 해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과연 ‘빡세고 티나는’ 인위적인 라인, 사람이라면 가질 수 없는 소위 ‘개 턱’같이 귀밑각이 없는 턱선, 그리고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V의 꼭지점같이 찔릴 듯한 턱끝을 환자의 요구대로 만들어주는 것이 잘하는 일일까? 웹툰 작가 마인드C가 그린 강남미인도 속의 소위 ‘강남성괴(성형괴물)’가 바로 이런 라인이다.


인형라인이라는 말도 사실 실체가 없다. 1959년 미국 마텔 사에서 처음 나온 바비 인형을 시대별로 보면, 초기부터 현재까지 전혀 개 턱이 아니며, 생각보다 꽤 사각턱이 있는 턱선이다.)





<자료출처 : 디아티스트 매거진 of 네어버. copyright ; Tenaflyviper>


나는 그렇게 ‘빡센 라인’으로는 수술 못 해준다고 버티면, 아마 환자는 조르다 못해 정말 개 턱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곳을 찾아가서 그렇게 수술 받을 것이다. 일부겠지만 거의 항상 개 턱을 만들어내는 곳에서는, 귀밑각을 다 없애는 것이 곧 사각턱수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필자는 미학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남자든 여자든, 귀밑각 일부가 존재해야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며, 더 트렌디하다.


개 턱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은 이유는 또 있다. 환자 한 분 한 분의 결과가 결국 보이지 않는 필자의 낙관(落款)이 찍혀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 환자 요청대로 필자가 개 턱을 만들어주었다고 가정하고 (내 눈에는 매우 불만족스럽지만) 환자가 대만족을 했다고 치자. 주위에서 그 개 턱을 다 알아볼 것이다. 누가 봐도 그건 원래 사람 턱처럼 안 생겼으니 대번에 알아본다. 어디서 이렇게 수술했냐고 물으면 환자는 (예뻐서 물어보는 줄 알고) 너무 기뻐하며 필자의 병원을 추천하겠지만, 주위 사람들은 필자의 병원을 맘속으로 조용히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을 것이다.


갸름한 걸 넘어 찔릴 것 같이 뾰족하고 오똑한 턱끝에 대한 환상도 옳지 않다. 해부학적으로도 비현실적인 기대일뿐더러, 설령 턱끝을 정말 그렇게 만든다 해도 현실적으로 아름답지 않다. 갸름한 얼굴을 계란형 얼굴이라고 하는데, 계란의 최하단은 결코 첨탑처럼 뾰족하지 않다.



결국 이 난처한 상황에서 어떤 결말이 가장 해피엔딩일까?

사실 돌출입은 어찌 보면 정답이 있는 수술이다. 합죽하게 해달라는 환자는 절대 없고, 돌출입을 굳이 남겨 달라는 환자도 (거의) 없다. 돌출입 수술의 경우에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딱 ‘적당한’ 정도의 입매라는 것이 존재하고, 이것을 산술적인 분석 데이터가 뒷받침해준다. 또한 동시에 턱끝의 전후위치와 길이를 조절해서 귀족적인 우아함과 앳된 귀여움 사이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런데 사각턱이나 광대뼈의 경우에는, 남김없이 싹 다 없애달라는 이런 식의 요구가 가끔씩 있다. 살면서 그 얼굴형이 지긋지긋했을 수도 있다. 필자가 끝까지 그렇게는 절대 안 된다고 했더니, 실제로 다른 병원에 가서 원하는 대로 수술을 해버리고 나서 후회했던 환자도 기억한다.


필자는 적당히, 적당량의 절골을 해서 자연스럽고 적당하게 갸름한 얼굴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환자는 빡세고 티 나는 인형라인을 원하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최선일까?


우선 환자를 설득했다. 귀밑각이 없어서 누가 봐도 수술한 티가 나는 얼굴은, 예쁘고 아름다운 게 아니다, ‘나 수술한거다~’라고 티내고 다니는 것이 명품백과 같은 자랑거리가 결코 될 수 없다고.


그리고 한 가지를 약속했다. 귀밑각을 살짝 남겨서 개 턱이 되지는 않을 범위 안에서, 필자가 평소 늘 하는 사각턱 절골량보다 더 많이 최대한 절골해드리겠다고.


일종의 타협이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이처럼 환자와 의사 사이의 이견의 간극을 좁히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환자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는 세심한 상담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세상 모든 일이 간극을 좁혀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사람은 모두 제각기 다른 존재다. 심지어, 오랜 기간을 같이 산 부부도 그렇다고 한다. 김용태 저 <부부 같이 사는 게 기적입니다>라는 책은 ‘부부가 일심동체라는 것은 환상이며, 부부는 둘이다’라고 설명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는 ‘안 통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갈등을 줄이는 선순환 대화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 중 첫째가 상대방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것이라고 한다.


* * *


그 환자를 실제로 수술하는 동안, 사실 수술이 평소처럼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다. 필자가 생각하는 딱 ‘적당한’ 정도보다 더 많은 양의 사각턱을 절골해야 했고, 그럼에도 환자가 ‘조금 더’를 원할 것 같아 추가로 한 번 더 다듬었다. 필자가 평소 자연스럽고 트렌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절골하는 수술이, 마음이 불편하고 내키지 않았지만, 환자와 미리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


직업병인 허리 통증을 달고 사는 필자가 만약 ‘그냥 저냥 적당히’ 수술한다면 내 몸은 더 편할지도 모른다. 완벽주의를 포기하면 마음도 덜 피곤할 것이다. 그러나, 적당하고 자연스러운 결과를 내기 위해, 필자는 ‘그냥 저냥 적당히’ 수술하지는 않는다. 적당히 수술하고 적당히 말로 때우는 의사를 가장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번 환자처럼 적당한 정도를 넘어서는 과도하고 비현실적인 요구를 할 때 그것을 다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환자의 취향을 최대한 적당한 선에서 반영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수술을 대충, 적당히 끝낼 수가 없다.


내 육체와 영혼이 타들어간다고 해도, 나를 믿고 수술대에 누운 환자에게 최대한 적당(的當)히, 딱 들어맞게 수술하려고 한다(사전에도 예시가 없는 的當을 여기에 처음 썼다). 그리고 사실, 수술할 때 나 자신을 불태우는 것이 환자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몰입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한 상 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준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발표, 강연

2018,2019 한국 및 타이완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초청강연

20년간 돌출입수술과 얼굴뼈 수술 경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