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9] [칼럼] 한상백의 돌출입과 인생 <114회> : 신의 한 수

신의 한 수



웬만한 잡기는 좀 할 줄 아는 필자가 거의 유일하게 문외한인 것이 바둑이다(대신 집에 바둑이는 한 마리 키운다고 썼다가 얼른 지웠다).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를 이긴 유일한 인간인 한국의 이세돌 9단이 둔 78번째 묘수는 ‘신의 한 수’였다고 한다.

20년이 되었으니 돌출입수술을 꽤 오래 했다. 물론 광대뼈, 사각턱, 턱끝 수술을 같이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 중에는 학생, 직장인, 취준생, 전업주부를 비롯해서, 현직 법조인, 승무원, 공무원, 교사, 강사, 전문직 등 수많은 직업군의 환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환자들이 있다. 필자의 글에 몇 번 소환된 적이 있지만, 빅5 병원의 성형외과 전공의, 트랜스젠더인 댄서, 알만한 연예인, 현직 성형외과 전문의와 그의 아내, 구강(악안면)외과 전문의인 치과의사를 돌출입수술 했던 기억이 특히 새롭다.

쌍둥이 자매, 모녀, 남매, 두 아들과 그 어머니, 내 의사친구의 두 딸을 모두 돌출입수술 했던 경험을 글로 쓴 적도 있다. 당뇨를 가진 여학생, 간경화을 가진 50대 남자, 근육병인 톰슨병을 가진 청년, 강박증 또는 조울증으로 투약 중인 환자, 청각장애우, 고도비만인 돌출입 환자들도 있었고, 새터민(탈북자)을 돌출입수술 해드린 적도 있었다. 환자분들마다 사연도 많았다. 값진 인연으로 만난 나의 환자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게 해 드렸다고 감히 자부한다.

앞으로 필자를 찾아오는 환자는 이미 한 번 본 듯한 환자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이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특이한 환자를 만날 가능성이 더 적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다시는 비슷한 환자가 날 찾아오기는 어렵다고 단언할 수 있는 케이스가 있었다.

40대 초반인 여자 환자 A가 필자와 상담을 시작한다.

나는 그녀가 상악이 더 돌출된 돌출입과 긴 무턱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말할 때 일부 보이는 전치부 치아가 보철물이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늘 봐 오던 돌출입수술과 턱끝수술 대상이었다.


반전은 상담 중간에 일어났다.


-저, 그런데요...원장님.

그녀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입안의 틀니를 뺐다. 위, 아래가 모두 틀니였다. 요즘은 여든을 넘긴 노인에서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틀니를 뺀 A 환자의 입안 상태는 믿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남은 치아는 도합(都合) 두 개. 나머지는 다 벌건 잇몸뿐이었다. 서로 맞닿는 큰어금니가 딱 한 쌍 남아 있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치아가 두 개밖에 남아있지 않던 환자의 사진. 개구기로 입을 벌린 상태>


돌출입을 가진 환자들의 치아를 20년간 봐 온 필자도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100세 시대에 아직 청춘인 40대 초반의 A씨의 상태를 본 순간, 진단보다 탄식이 먼저 흘러 나왔다.


-아아...아직 젊으신데...어쩌다가...


환자의 말로는 치아가 원래 잘 썩었고 관리가 안 되어 방치하다가 보니 만성 치주염이 되어 하나 둘씩 빠지고 사라졌으며, 결국 부실한 몇 개 치아까지 다 발치해버리고 나니 결국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A는 이대로 살 수는 없어서 임플란트를 하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임플란트를 하기 전에 돌출입부터 해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치아가 거의 전무(全無)한 상태인데, 4개의 발치가 필요한 돌출입수술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필자가 써놓은 글을 보니 치아 임플란트는 돌출입수술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씌어 있어서, 어찌하면 좋을지 직접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사실 그녀의 치아 상태는 엉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황당한 것이었다. 치아가 있어야 ‘치아 상태’라는 말을 쓸 텐데, 치아가 아예 없었다. 그런데 사실, 너무 흥미로웠다. 치아가 전혀 없는 돌출입수술을 꼭 필자의 손으로 집도해드리고 싶었다. 하나의 열망에 가까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A는 돌출입수술을 받았고, 그 선택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그녀에게 돌출입수술이 신의 한 수였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발치를 할 필요가 없다.

돌출입수술은 필연적으로 전신마취 후 총 4개의 치아를 발치하고 수술하게 된다(상악만 돌출된 경우는 물론 상악만 두 개 발치한다).

그런데, 발치를 해야만 돌출입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환자의 경우에서 발치할 치아가 없어서 돌출입수술을 못한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발치가 이미 (싹 다) 되어 있으니, 발치하는 과정은 건너뛰고 적정한 위치에서 잇몸뼈에 돌출입수술을 하면 된다. 즉, 과정상으로만 보면 한 층 더 간단한 셈!



둘째, 아주 어려워 보이는 수술이지만 사실은 더 쉽다.

환자는 치아상태가 너무 엉망이니 자신의 돌출입수술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케이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필자에게는 그 환자의 돌출입수술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케이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인 돌출입수술의 경우 보통 송곳니 옆의 치아를 발치하게 되며, 발치 공간을 이용해서 절골술을 할 때, 이웃하고 있는 치아들의 뿌리가 손상되지 않도록 항상 최선의 주의를 기울이면서 절골을 해야 한다.

그런데, 치아도 치아뿌리도 아예 없는 무주공산의 잇몸뼈이니, 치아뿌리가 손상될 일이 없다. 없는 것이 어떻게 손상이 되나.

게다가 치아가 없으니, 위, 아래 치아교합을 미세하게 맞춰주는 과정 역시 불필요했다.



셋째, 그녀의 입은 골격성 돌출입에 관한 신의 실험(God's experiment)에 다름 아니다.

틀니를 모두 제거한 상태에서도, 그녀의 상악은 꽤 돌출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 환자의 인중과 윗입술이 돌출된 것은 그녀의 치아 때문이 아니고 골격, 즉 잇몸뼈 자체가 돌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즉, A의 돌출입은 골격성 돌출입의 표본과도 같다.

필자가 어떤 환자의 돌출입에 대해, 당신은 ‘골격성 돌출입’이므로 돌출입수술의 대상이라고 진단하면, 환자가 속으로는 ‘치아 때문 아닐까? 교정만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이 환자의 경우를 보라. 그녀의 치아 하나 없이 덩그렇게 남은 잇몸뼈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자백하고 있었다. ‘다 내 탓이다. 이게 바로 골격성 돌출입이다.’

골격성 돌출입이 분명한데도 치아 때문에 입이 나온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자 그럼 당신의 치아를 다 빼봅시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녀의 입은 그야말로 잇몸뼈 골격이 만들어내는 돌출입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신의 실험(God's experiment)이자 묘수였던 셈이다.



넷째, 임플란트 비용을 네 개 줄인 셈이다.

이 환자가 돌출입수술 없이 치아 임플란트를 했다면 아마 총 28개(사랑니를 제외한 정상인 치아 총 개수) 중 현재 존재하는 두 개를 제외한 26개의 임플란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돌출입수술은 원래 4개의 발치공간을 이용해 전치부 잇몸뼈가 후방이동되는 수술이다. 이런 원리로, A 환자는 돌출입 수술을 통해 악궁이 작아지면서 임플란트를 할 치아 개수가 4개나 줄어든 것이다. 비용으로 환산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므로, 아마 돌출입수술을 하는 데에도 경제적인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역으로, 돌출입수술 없이 그냥 26개의 임플란트로 악궁을 꽉 채웠다면, 최대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돌출입을 만든 셈이 되었을 것이다.



다섯째, 수술 후 마무리교정이 필요 없다.

일반적으로 돌출입수술 후에는 발치공간이 약간 남게 되며, 이 공간을 메우면서 나머지 치아배열과 교합도 더 정교하게 개선시킬 목적의 마무리교정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이 환자는 치아가 두 개 빼고는 아예 없으므로, 수술 후 교정을 하려야 할 것이 없다. 마무리교정 비용도 전혀 들지 않으니, 이 역시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여섯째, 꿩도 먹고 알도 먹게 되었다.

성형수술의 목표는 아름다움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워진 입매가 그녀를 빛나게 했다. A는 수술결과에 만족했을 뿐만 아니라 임플란트 비용과 교정비용을 절약하는 보너스도 얻었다. 사실, 필자도 수술이 상대적으로 더 쉬운데다 보람도 있었으니, 꿩과 알을 좀 나눠가진 셈이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고려사항이 없지 않았다. 이 환자의 돌출입수술에서 키포인트는 아름다운 입매를 만드는 미용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추후 임플란트로 치아 기능을 회복하는데 최적화된 잇몸뼈의 위치를 잡아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수술 계획 단계에서부터 수술을 집도하는 동안에도 최적,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미세한 부분까지 더 집중했다.


* * *


‘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즐겨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은 주위 경관뿐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게 된다(Slow down and enjoy life. It's not only the scenery you miss by going too fast, you also miss the sense of where you are going and why).’ 미국의 희극, 뮤지컬 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에디 캔터의 명언이다.


환자가 속도를 줄이며 산 것인지 게으르게 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치아를 거의 다 잃은 환자가 제때 제때 결손 치아를 임플란트로 대체하지 않은 것, 그리고 비로소 임플란트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곤 그 전에 돌출입부터 넣고 보자는 다소 엉뚱한 결심을 한 것은 결과론적으로는 신의 한 수였다.


필자를 찾아온 것 역시 신의 한 수였다고 해두자. 처음 황당한 치아 상태를 보고 꼭 수술을 해드리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고 글머리에 썼었는데, 어렵거나 흥미로운 수술 케이스의 환자들에게 재미있는 수술이 될 거 같아 내가 꼭 좀 수술하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한다(수술 덕후 같지 않은가?). 내게 수술이 즐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재미삼아 수술하는 건 아닐뿐더러, 환자에게는 일생일대의 선택이고 재미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간 A 환자는 치아 없는 것도 괴롭고, 돌출입도 서러웠을 것이다.


마침,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신의 한 수, 2014>에 나오는 명대사가 있어 소개한다.

“원래 하수가 걱정이 많지. 세상은 고수에게는 놀이터요, 하수에게는 생지옥 아닌가.”

바둑도 그렇겠지만, 인생도, 돌출입수술도 그렇다.




한 상 백


현 서울제일 성형외과 원장

서울대 의학박사, 성형외과전문의

서울대 의대 준우등 졸업

서울대 의대 대학원 졸업 및 석, 박사학위 취득

서울대병원 수련의, 전공의, 전임의

서울대학교병원 우수전공의 표창(1996년)

전 서울대 의대초빙교수

저서 돌출입수술 교정 바로알기(명문출판사,2006)

대한 성형외과 학회 정회원

대한 성형외과학회지 논문게재 및 학술대회 발표, 강연

2018,2019 한국 및 타이완 성형외과 국제학술대회에서 돌출입수술 초청강연

20년간 돌출입수술과 얼굴뼈 수술 경력